본문: 눅 14:1-14
제목: 성도가 버려야 할 것
인간의 속성은 <내가 싫어하는 것을 내게 강요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나 신앙은 나의 원함이 아닌, 하나님의 원하심을 따라 사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버리길 원하시는 것들이 있다. 성도가 버려야 할 것은 무엇인가?
첫째, 고정관념과 고집을 버리라.
예수님은 안식일에 수종병에 걸린 사람을 고쳐주시면서 율법교사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안식일에 병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3절)라고 물으셨다. 그런데 그들은 잠잠하였다. 또 말씀하시길,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이라도 건져내지 않겠느냐”(5절) 라고 말씀하셨다. 거기에 대해서도 바리새인들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들이 대답하지 않았다는 것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말씀 앞에 자기들의 생각을 고쳐먹었다는 뜻인가? 아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 왜인가? 자기들의 고정관념과 고집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이 고정관념과 고집에 빠지면 신앙생활을 바르게 못한다. 신앙의 무서운 대적은 <우리 안에 있는 고정관념과 고집>이다. “교회는 이래야 해. 신앙생활은 이래야 해. 목사는 이래야 하고, 성도는 이래야 해.” 이런 고정관념에 사로잡히면 신앙생활이 건강하지 못하다. 늘 정죄하고 비난하고 자기만 의롭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안된다. 성도는 자신의 생각을 늘 말씀에 비추어야 한다. 말씀 앞에서 고정관념과 고집을 내려놓을 때, 하나님과 충돌하지 않고 바른 관계를 회복하게 된다. 말씀 앞에서 고정관념과 고집을 버리는 성도가 되라.
둘째, 높아지려는 교만을 버리라.
예수님은 초청받아 온 사람들이 높은 자리를 택하는 것을 보셨다. 그래서 혼인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높은 자리에 앉지 말고, 차라리 끝자리에 가서 앉으라고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높은 자리에 앉았다가 끝자리로 가면 그런 창피도 없지만, 끝자리에 앉았다가 주인이 와서 높은 자리로 인도하면 얼마나 영광스럽냐는 것이다. 이 말씀의 뜻은 “스스로 높아지려고 하는 것을 버리라”는 말씀이다. 사람은 남들에게 인정받고 싶어하는 마음과 높은 자리에 오르고 싶은 마음이 있다. 이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그런데 신앙은 인간의 본성과 충돌이 된다. 왜냐하면 신앙의 요구는 <낮은 자리로 가라>고 요구하기 때문이다. 막10:43-44“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왜 그래야 하는가? 인간은 <하나님 앞에 자랑할 것이 없는 죄인>이기 때문이다. 성도는 자기의 무가치함을 아는 사람이다. 그런데 자기 영광을 구한다면 올바른 믿음이라고 할수 없다. 왜냐하면 믿음의 길은 세상의 영광을 얻기 위함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도의 싸움은 낮아지기 위한 싸움이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고, 오직 은혜로만 사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신앙의 기본이다. 자기 영광을 구하지 않고, 겸손히 낮아져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높여주실 것이다.
셋째, 근시안적인 계산을 버리라.
예수님은 사람을 청할 때 친구나, 형제, 친척, 부한 이웃을 초청하지 말고, 가난한 자, 몸이 불편한 자, 저는 자와 맹인을 청하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갚을 힘이 있는 사람들은 다시 갚아주면 끝이지만, 갚을 힘이 없는 자들을 대접하면 하나님이 갚아주시는데, 그것이 복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지금 보상받으려 하거나 지금 대접받으려 하지 말고, 나중에 주님께로부터 보상을 받으라는 것이다. 나중에 주님이 갚아주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나중이 아닌, 지금 보상을 받고 싶어한다. 세상의 경제 원리는 <근시안적>이다. 이 땅만 본다. 눈앞의 것에만 투자한다. 그러나 신앙의 원리는 지금 당장이 아닌, 영원을 바라보고 투자하는 것이다. 당장 눈앞의 것만 보는 근시안적인 계산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받을 복이 없다. 눈앞의 것만 쫓아가다가 주님의 손을 놓치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께 부요하지 못한, 영적으로 가난한 자가 된다. 눈앞의 것만 보다가 영원한 것을 잃어버리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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