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눅 13:18-30
제목: 하나님나라에 합당한 자
주님은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시면서, 어떤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인지를 설명하신다.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는 어떤 사람인가?
첫째, 겨자씨와 누룩처럼 부족하지만 은혜를 의지하여 사는 자.(18-21)
주님은 왜 하나님 나라를 하필이면 겨자씨와 누룩에 비유하셨을까? 사실 가치적인 면에서 보면, 겨자씨나 누룩은 아무 것도 아닌, 볼품없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겨자씨나 누룩은 <가치없는 것과 부정한 것>을 의미하기에 하나님 나라의 위대함을 설명하는 도구로는 적절하지 않다. 그런데 주님은 왜 겨자씨와 누룩으로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시는 것인가? <하나님 나라는 눈에 보이는 것으로 판단하면 안된다>는 것을 가르치시고자 함이다. 우리의 신앙현실과 수준은 겨자씨처럼 볼품없고, 누룩처럼 정결하지 못하지만 낙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왜인가? 하나님 나라는 은혜가 왕 노릇하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어제 본문에 회당장은 주님께서 18년동안이나 귀신들려 허리를 펴지 못하는 여자를 고쳐주시자 분노했다. 왜인가? 회당장의 눈에 그 여자는 겨자씨처럼 볼품없고, 누룩처럼 부정한 존재였다. 그런 여자를 위해 율법을 어기는 예수님의 모습이 이해가 안되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보기에 세리와 창녀와 죄인들은 겨자씨처럼 볼품없고, 누룩처럼 부정한 존재들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들의 눈에 가치 없고 부정하게 보이는 사람들을 천국으로 인도하신다. 어떻게요?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통해서이다. 하나님 나라는 나의 업적과 공로를 자랑하는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이 은혜로 이루신 일을 감사하는 나라이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대로 판단하지 말고, 오직 은혜 안에 살며 감사하는 성도가 되라.
둘째, 예수 믿는 믿음으로 좁은 문에 들어가기를 힘쓰는 자.(22-30)
주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24절)고 말씀하셨다. 좁은 문은 기본적으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주님은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다”(24절)고 하셨는데, 그 의미는 <구원받고자 하는 사람은 많은데, 구원받는 사람은 적다>라는 뜻이다. 왜인가? 그 이유는 그 좁은 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외에는 결단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다. 다른 방법으로는 구원의 문이 열리지 않는다. 그런데 어떤 이는 예수를 믿는 믿음이 아니라, 율법의 행위로 구원받으려고 하니 문이 열리지 않는 것이다. 25절에 어디에서 온지 알지 못한다는 말은 <나는 너희를 모른다>는 뜻이다. 즉 <그 방법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 어떤 이는 26절에 “우리가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친분관계>를 주장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내가 예배드렸잖습니까? 내가 봉사했잖습니까? 내가 성경을 열심히 배우지 않았습니까?” 이 정도면 <주님과 관계가 있다는 증거가 아니냐>는 것이다. 그런데 27절에 보면, <그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행악하는 자들>이라고 하시면서 떠나가라고 하신다. 그런데 무엇이 <행악>인가?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받는 것인데, <자기 나름의 생각과 근거>를 가지고 구원받으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 바로 그것이 <악을 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예수 믿는 믿음이 방해받지 않도록 힘써야 한다. 믿음의 길에 방해가 되는 것은 벗어버려야 한다. <예수님만 믿는 믿음>에 방해가 되는 것은 ⓵우리의 자아, ⓶세상의 풍속, ⓷마귀의 유혹이다. 이것들을 벗어던지기 위해 힘써야 한다. 그렇지 않고 믿음에 방해를 받게 되면, “먼저 된 자가 나중 되는 일”이 일어나고, 그로 인해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된다는 것이다. 어떤 방해가 있어도 오직 예수만 붙드는 믿음으로 좁은 문에 들어가기를 힘쓰는 성도가 되라
댓글 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