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누가복음 11:37-54
제목: 진정한 경건이란
어떤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점심 식사자리에 초대해서 벌어진 일을 오늘 본문이 소개합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욕(?)하고 싫어하셨던 그래서 막말을 쏟아 놓으셨던 바리새인이었지만 그래도 예수님은 그들의 초대에 응하셔서 오늘도 하실 말씀을 전하십니다. 우리도 우리 예수님의 열심을 본받길 소원합니다. 쟤랑은 안 놀아가 아니라~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단절된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평화의 메신저로 세상 속 에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길 소원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예수님이 말씀하신 진정한 경건이란 무엇인지 살펴보고 우리도 진정으로 경건에 이르는 성도들 되시길 소원합니다.
진정한 경건이란?
첫째. 경건은 안과 밖이 모두 깨끗한 것을 의미합니다.
문제의 발단은 38절에서 예수님이 손을 씻지 않고 식사를 하는 모습을 보고 이상히 여기는 것에서부터 시작을 합니다. 인간의 마음을 아시는 주님께서는 바리새인의 의문에 다음과 같이 책망하셨습니다. 39절입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라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식사전 손을 씼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 아닌 율법의 부속 조례와 같은 것으로 오랜 세월동안 형성되어온 안식일에 해서는 안되는 것들과 같은 관습법과 같은
랍비들이 만들어 놓은 그런 행동이었습니다. 지금이야 손을 씻고 식사를 하는 것이 당연한거지만 사실 중국만해도 그런지가 얼만 안됐죠? 이 손을 씻는 일을 4000년 전 모세의 율법에서부터 시작했으니 이는 대단하기만 한 일인거죠? 그 처음 시작은 세상과 구별됨. 하나님 앞에서 성결하고자 노력한 아주 바람직한 행동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하나님 앞에서 거룩이라고 하는 본래 의미는 퇴색이 되어지고
형식만 남아 하나님을 경히 여기는 수단 중의 하나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생각하기에 예수님은 일부러 손을 씻지 않고 식사를 하시고 계십니다. 바리새인들의 위선된 행위를 꾸짖기 위해서 였습니다.
위선이라는 단어는 가면을 쓰다라는 뜻입니다.
39절 “바리새인들아 너희 잔과 겉은 깨끗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거짓이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40절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든 것이 아니냐? 왜 겉에만 치중하고 안은 신경쓰지 않냐는 것입니다.
또 42절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박하와 채소같이 자잘한 것에 대한 십일조는 철저히 하면서도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버린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십니다. 지금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십일조 행위/ 손을 씻는 행의를 책망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행위는 정당하다. 잘했다.
그러나 그 율법의 본질 “하나님에 대한 사랑 이웃에 대한 사랑을 잊지 말 것을”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님들 진정한 경건은 안과 밖이 깨끗해야 합니다. 밖 행위가 경건하다면 안 그 마음과 태도와 정신까지도 경건해야 진정한 경건이라고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마음이 바르면 태도에서 타나날 수 밖에 없고 태도가 정중하면 그 마음 또한 바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경건이란 안과 밖이 형식과 마음이 모두 깨끗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이 말씀하신 진정한 경건이란
둘째. 자신을 향한 반성과 절제이어야 합니다.
계속해서 예수님께서 43절 인사 받기 좋아하는 교만한 바리새인들아~
44절 보이지 않는 무덤 같은 바리새인들이라고 책망하자 한 율법교사가 45절에서 예수님 그렇게 말씀하심은 우리까지 모욕함이니이다.
이렇게 말해서 그래서 파트 2 율법교사에 대한 책망이 시작됩니다.
화 있을진저~ 라고 하셨지만 마태복음에서는 더 심하게 이 독사의 자식들아 라고 하셨습니다. 이 망할 율법교사들아 46절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다”
이 율법학자들의 가장 큰 문제점을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너희들이 정말 많이 연구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렇다 이렇게 해야 복을 받는다 라고 말은 하지만 정작 너희들은 그 말씀을 지킬 마음이 없는구나?
이 얼마나 정확하고도 충격적인 비판이십니까?
그동안 많은 선지자들을 하나님이 보내셨으나 많은 율법학자들이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며 많은 선지자들을 죽이고 백성들을 미혹케 해왔습니까? 사사 시대의 율법학자들이 그랬고 왕정 시대의 율법학자들이 그랬고 포로 시대의 율법학자들이 그랬고 예수님 당시의 율법학자들이 그래서수많은 선지자들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죽여왔습니다.
최후의 선지자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조차 안식일을 범했다는 이유로. 신성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데 최선을 다한 이들입니다. 52절 너희가 지혜의 열쇠를 가져가서 (누구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한 사람들이었지만)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 평생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하나님과 반대되는 일을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들을 죽이고 그의 아들 예수님을 죽이는 우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이들이 잘못한 최대의 실수가 무엇입니까? 경건을 자신이 아닌 남에게 강요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진정한 경건은 남을 향한 비난과 비판이 아닌 자신을 향한 철저한 반성과 절제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진정한/경건은/ 바른 율법은 남을 지적하는데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돌보아 보는데 사용되어야 합니다.
이게 남을 향하게 된다면 율법주의와 경건주의가 되어 많은 사람들을 지옥백성 만드는 일을 하게 될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진정한 경건은 자신을 향한 철저한 반성과 절제이어야 합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그런데 성도님들 한 가지 오해 하시면 안되는게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금식과 기도와 십일조와 열심을 책망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들을 버리라고 하지 않으시고 그것들과 함께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의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보다 낫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갈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행위는 본받고 외식은 본받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겉만 소중하게 생각했다면 우리는 속도 생각하면 됩니다. 또한 이 말씀은 나를 돌아보는 잣대가 되어야지 남을 향한 가늠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철저히 말씀 앞에 순종하고 낮아짐으로 하나님께 경건하다 인정받는 우리 심천사랑의교회와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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