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왕하 18:1-16
제목: 믿음으로 산다는 것
본문 말씀은 남쪽 유다의 13대 왕이었던 히스기야에 대한 말씀이다. 히스기야는 다윗의 길로 걸어갔던 왕으로서, 1)하나님이 보시기에 정직한 왕(3절)이었으며, 2)하나님을 의지하는 왕(5절)이요, 3)하나님과 연합한 왕(6절)이요, 4)무슨 일을 하든지 형통한 왕(7절)이었다. 그런데 9절에 앗수르왕이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후 남유다를 침공했다. 그 이유는 히스기야가 하나님만 의지하기 위하여 그의 부친 아하스왕 때부터 섬겼던 앗수르를 배신하고 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로 인하여 남유다의 운명은 태풍 앞의 촛불같은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이 무엇인가?
첫째, 믿음으로 사는 삶에는 언제나 넘어야 할 산이 있다.
성경은 이방인과의 친교를 근본적으로 허락하지 않는다. 그래서 히스기야는 믿음으로 살기 위하여 앗수르를 의지하는 정책을 버렸다. 그러나 결국 그 결정으로 인해 앗수르의 미움을 사게 되어 나라가 위기에 빠진 것이다. 사실 이런 상황이 닥치게 되면 믿는 사람들은 당황하기 마련이다.“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지? 하나님을 잘 믿으려고 한 선택인데,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기는커녕, 왜 오히려 위기가 오는거지? 하나님이 막아주셔야 하는 것 아닌가?”일반적으로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진실되고 순전한 믿음으로 살려고 하는 사람에게 오히려 어려움이 온다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믿음의 길>은 세상의 원리와는 정반대의 길이기 때문이다. 성경을 보더라도 언제나 믿음으로 살려고 했던 사람들은 당하지 않아도 되는 어려움을 당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에 적당히 넘어갔더라면 감옥에 갇히는 고난을 겪지 않았을 것이다. 다니엘도 신앙생활을 적당히 했다면 사자굴 속에 들어가는 고난을 겪지 않았을 것이고, 다니엘의 세 친구도 적당히 세상에 굽히고 살았더라면 뜨거운 풀무불 속에 들어가는 일은 겪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믿음으로 살려고 했기에 고난을 당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의 길에 어려움이 있다고 당황할 필요가 없다. 또한 하나님을 믿는데 왜 어려움이 있냐고 의심할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그 모든 상황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알고 계시며, 믿는 자에게는 반드시 넘어야만 할 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벧전4:12-13에도 우리에게 닥쳐오는 불시험에 대해서 이상한 일 당하는 것처럼 생각하지 말라고 말씀한다. 왜냐하면 믿음으로 사는 길에 나타나는 고난은 나중에 더 큰 영광과 상급을 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히스기야는 앗수르와의 전쟁에서 기적같은 승리를 얻게 되고, 큰 영광을 누리게 된다. 앗수르라는 위기가 없었다면 히스기야의 영광도 없었을 것이다. 넘어야 할 산이 크면 클수록 그에 따르는 영광도 크다는 것을 기억하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실 영광과 상급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눈앞에 있는 큰 산을 넘어가기 바란다.
둘째, 세상과의 타협은 언제나 믿음의 손해만 있고 유익은 없다.
앗수르왕이 남유다의 모든 성읍을 쳐서 점령하자, 히스기야는 앗수르왕에게 무릎을 꿇는다. 본문 14-16절을 보면 히스기야는 자기가 앗수르 왕에게 범죄했다면서 용서를 빌었고, 은300달란트(은 10,281kg)와 금 30달란트(금 1,028kg)를 바치라는 앗수르왕의 요구에 히스기야는 성전 안에 있는 금과 은, 심지어 성전기둥에 입힌 금까지 싹싹 끍어서 앗수르왕에게 갖다 바쳤다. 안타깝게도 히스기야는 믿음으로 살려고 했다가, 방법이 보이지 않는 너무 큰 어려움이 오자,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을 내려놓고 세상에 무릎을 꿇는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17절에 히스기야가 바친 금과 은을 받은 앗수르왕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20만명의 군사로 예루살렘을 포위한다. 결국 히스기야는 믿음을 포기함으로 인해 하나님 앞에 뵐 낯이 없고, 돈은 돈대로 손해보고, 더 큰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차라리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믿음이라도 지켰다면 히스기야는 다윗왕같은 위대한 왕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후에 하룻밤 사이에 앗수르 군사 18만 5천명을 시체로 만드시는 놀라운 일을 행하셨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은, <어떤 상황, 어떤 형편일지라도 믿음을 양보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결국 이것도 저것도 다 손해만 보고, 아무 유익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고 미련한 짓이 세상 때문에 믿음을 양보하는 일임을 깨닫고,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믿음을 지키는 성도가 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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