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열왕기하 16:1-20
제목: 전제가 잘못되면 망한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전제가 잘못되면 망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전제를 가지고 원인을 분석하고 판단하기에 잘못된 과정과 결론을 만들어 내고 그로 인해 더욱 더 어려운 또는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만들어 내는 많고 많은 사람들을 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온 유다 요담의 아들 아하스가 전제가 잘못되서 망한 대표적인 예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바른 전제를 통해 영이 살고 육이 사는 놀라운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첫째, 출발부터가 잘못된 아하스 왕
유다 요담의 아들 아하스가 왕이 될 때의 나이는 20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3절 그의 삶이 하나님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지 아니하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여러 왕의 길로 행하며 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의 가중한 일을 따라 자기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며” 유다 왕의 길은 다윗의 뒤를 따라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산 인생을 말하고 이스라엘 왕의 길은 아합과 같이 하나님을 따르지 않고 우상숭배를 한 인생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하스는 안타깝게도 이스라엘의 악한 길로 갔다고 합니다. 게다가 4절 “또 산당들과 작은 산위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더라” 한 나라의 왕이 되어서 하나님을 찾고 백성들이 바른 길로 갈수 있도록 도와야 함에도 아하스는 왕이 되어 솔선수범하여(?) 자기 아들을 불 가운데 지나가게 하는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악행을 자청합니다. 이런 출발을 가진 인생이고 왕이었기에 그의 인생은 비참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5절과 6절에서 “아람의 왕 르신과 이스라엘 왕 베가가 예루살렘을 에워싸고 전쟁을 합니다. 그런데 출발이 잘못됐던 왕이었던 아하스 왕이었기에 어떤 선택을 했을까요? 물론 어떤 왕은 자신의 과오를 깨닫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회개 했을 수도 있었겠지만 아하스 왕은 그 다음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7절 “아하스가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에게 사자를 보냅니다. “나는 왕의 신복이요 왕의 아들이라 이제 아람 왕과 이스라엘 왕이 나를 치니 청하건대 올라와 그 손에서 나를 구원하소서 하고” 성도님들 이 고백을 디글랏 빌레셀이 아닌 여호와 하나님 앞에 했다면 유다의 운명도 아하스 왕의 운명도 달라졌을 것입니다. 성도님들 방향을 잘 선택하셔야만 전제가 잘 되어야만 바른 선택을 할수 있습니다. 내가 누구를 의지해야 하는지? 내가 어떤 대상을 의지해야 하는지 꼭 기억하시고 바른 선택하시는 성도님들 되시길 소원합니다.
둘째, 여호와가 아닌 다른 것을 구한 아하스 왕
하나님이 아닌 디글랏 빌레셀에게 ‘나의 왕이요 나를 구원하소서’ 했던 아하스 왕은 한술 더 떠서 8절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은금을 내어다가 앗수르 왕에게 예물로 보냅니다. 이에 9절에서 앗수르 왕은 그 청대로 다메섹을 쳐서 점령하고 아람왕 르신을 죽입니다. 세상의 관점에서 보면 잘한 선택인 듯 보입니다. 일단 급한불은 막은 것처럼 보이니까요? 그러나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성도님들이 더 잘 알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에 아하스 왕은 10절에서 앗수르 왕을 만나러 다메섹에 갔다가 거기 있는 제단을 보고 그것을 그려다가 유다의 제사장인 우리야에게 보냅니다. 또 그것을 제사장은 우리야는 왕의 명령대로 왕이 돌아오기 전까지 잘 만들어 왕이 제사를 드릴수 있도록 합니다.
그런데 그 제사는 여호와 하나님을 위한 제단이 아니었습니다. 다메섹에서 보고 온 제단이었기에 그것은 우상을 위한 잘못된 제단이었습니다. 앗수르는 다른 나라를 점령하더라도 자기의 신을 강요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디글랏 빌레셋은 아하스에게 자신의 신을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하스 왕이 앗수르 왕을 만나보고 오더니 그 나라가 이렇게 강력한 이유는 다 앗수르가 좋을 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앗수르를 따라 앗수르의 신을 섬기기 위한 제단을 만들기로 한 것입니다. 그것도 여호와의 성전에서 기물을 빼다가 이 우상숭배용 제단을 만들었으니 참으로 경탄할 노릇입니다. 잘못돼도 한 참 잘못된 전제입니다. 마치 미국이 소련보다 달에 사람을 보내는 유인우주선 경쟁에서 진 것은 소련은 진화론으로 무장한 과학을 배우고 미국은 창조론에 입각한 철학을 배우고 있다고 잘못 전제한 덕분에 공립학교에서 창조론 수업이 금지되고 십계명과 주기도문을 떼도록 했던 조치를 취했던 것처럼. 미국이 이렇게 잘사는 것은 다 동성애를 받아들인 포용성의 결과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전제처럼 중국이 이렇게 잘사는 것은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드렸기 때문이다. 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아하스 왕은 유다의 국력은 앗수르의 신을 섬기면 부강해 질것이라는 잘못된 전제를 가지고 유다를 통치하게 됩니다.
그래놓고도 앗수르 왕을 두려워 하여 안식일에 쓰기위하여 건축한 성전의 일부를 떼다가 예루살렘 성전을 방비하는데 쓰는 어리석은 일을 범하고 맙니다. 그 결과가 어떻습니까? 아하스의 통치 기간 중에 하나님이 나타나지 않으십니다.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십니다. 아무 반응도 없습니다. 그저 19절 “아하스가 행한 그 남은 사적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이러고 끝입니다. 성도님들 전제가 잘못되면 망합니다. 이 노력과 정성과 수고를 다른 대상이 아닌 여호와 하나님을 위해서 사용했다면 그도 유다도 하나님의 평강을 누렸을 것입니다. 바라옵기는 바른 전제로 바른 방향설정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하나님의 평강을 누리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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