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왕상1:11-27
제목:하나님의 사람이 마땅히 행할 바
본문은 솔로몬이 왕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다루고 있다. 그런데 그 과정 가운데 하나님의 사람 나단 선지자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보여준다. 하나님은 영적 공동체가 위기에 처했을 때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 위기를 극복하게 하신다. 우리 모두가 나단 선지자같은 사람이 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의 사람이 어떤 원리에 의해 행동하는지를 배울 수 있어야 한다.
첫째, 하나님의 사람은 눈앞의 현실을 보지 말고 하나님의 약속을 보아야 한다.
나단선지자는 아도니야가 왕이 되는 것을 막고자 한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인가? 아도니야가 자기를 부르지 않아서 삐진 것인가? 아니면 아도니야가 왕이 될만한 자질이 없었기 때문인가? 아니다. 선지자 나단이 아도니야가 왕이 되는 것을 반대하는 것은 아도니아에게 왕의 자질이 없어서가 아니다. 나단은 왕의 자질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 누구에게 주어져 있는가>를 보는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솔로몬에게 주어져 있었다. 나단은 이것을 알았기에 아도니야 편을 들지 않고 약속의 성취를 위해 솔로몬의 편을 드는 것이다. 사실 돌아가는 상황과 형편을 보면 나단은 솔로몬의 편을 드는 것이 아니라, 아도니야의 편을 드는 것이 유익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아도니야의 편을 드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군대장관 요압마저 아도니야의 편을 들었기 때문에 군대가 솔로몬에게서 등을 돌린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아도니야가 아닌, 솔로몬의 편을 드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나 나단 선지자가 대세인 아도니야가 아닌, 약세인 솔로몬을 선택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솔로몬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역대상28:5“하나님께서 다윗의 모든 아들 중에서 솔로몬을 택하사 왕으로 삼아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하려 하실새”나단은 힘있는 사람의 편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사람 편에 섰다. 성도는 눈에 보이는 현실을 따라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움직이는 사람이어야 한다. 눈에 보이는 현실은 참된 것이 아니다. 모든 일은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방향으로 흘러가게 될 것이다. 이것을 알고 믿는 사람은 환경이 아닌, 말씀을 붙들게 된다. 눈에 보이는 현실은 예수 믿는 것이 아무런 힘이 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에 의해 흘러간다. 그러므로 약속을 붙들지 않고 환경을 붙드는 사람을 부러워하지 말라.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지 않는 자의 마지막은 아도니야와 같다. 아도니야의 결국은 멸망이다. 사람은 눈에 보이는 현실을 두려워하고 쉽게 낙심한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의 삶이 눈에 보이는 현실에 붙들려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에 의해 지금의 내가 존재함을 잊지 말라. 우리의 존재근원은 하나님이다. 성도는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
둘째,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깨어 있어야 한다.
11절에“우리 주 다윗은 알지 못하나이다”, 16절에“왕이 이르되 어찌됨이냐”즉, 다윗은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지 못하고 있었다. 다윗은 하나님이 명령하신 일, 즉 솔로몬을 왕으로 세우는 일(대상28:5)이 무너지게 될 위기에 있음을 알지 못했다. 물론 다윗의 이러한 무지 때문에 하나님의 뜻이 실패하지는 않았다. 하나님께서 다스리시기 때문에 우리의 무지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일로 인해 불안해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모두가 무지한 상태에 있을지라도 누군가는 깨어있어야 한다. 나단선지자는 이스라엘에 일어나는 일들을 살피고 있었다. 그는 하나님이 세우신 영적 공동체가 어떤 방향으로 가는지, 하나님의 뜻대로 가고 있는지, 아니면 하나님의 뜻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가는지 깨어서 살피고 기도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다윗이 범죄(밧세바와의 간음)했을 때도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전달한 사람이었고, 오늘 본문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아닌 일이 발생하자, 즉시 일어나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힘썼다. 오늘날 교회 안에는 아도니야같은 사람들이 있다. 교회는 아도니야같은 사람들에 의해 하나님의 뜻이 아닌, 사람의 뜻대로 가게 되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교회 세습 등) 아도니야는 하나님의 뜻은 관심이 없고 오직 자기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 대표적인 사람이다. 성도는 자기 안에 있는 아도니야를 제거해야 한다. 성도는“하나님께서 나를 이땅에 두신 이유가 무엇인가?”를 생각하지 않고, 환경 앞에 울고 웃으며 그저 자기의 원함을 이루기 위해 사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된다. 성도는 자기 뜻을 이루려고 하는 사람이 아니라, 나단처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람으로 이 땅을 살아야 한다. 내 인생이 어떻게 될지를 불안해 하지 말고, 나를 이 땅에 두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힘쓰는 성도가 되라. 그러면 그 다음은 하나님이 책임지신다. 마6:33“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기도제목>
1. 우리는 믿는다고 말하지만,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눈에 보이는 현실에 매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의 삶은 현실이 아닌, 은혜로 여기까지 왔습니다. 성도의 근원은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현실앞에 좌절하거나 낙심치 말고,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 앞에서“나의 믿음없음을 도와주소서”외쳐야 합니다. 현실 앞에서 한계를 드러내지 말고 믿음을 드러내는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나님의 사람 나단처럼 현실보다 말씀을 선택할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2. 성도가 속한 가정과 일터와 교회는 사람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대로 가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지 않고, 오직 눈에 보이는 것만 쫓아간다면 방황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아도니야를 제거할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그래서 우리의 가정과 일터와 교회가 주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로 쓰임받게 되도록 기도합시다. 눈에 보이는 것이 없고, 손에 잡히는 것이 없어도 낙심하지 말고, 먼저는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며, 결과는 주님께 맡기는 가정과 일터와 교회가 되도록 기도합시다.
3. 코로나 사태로 인하여 상황은 안개에 덮인 것처럼 그 결과를 알수 없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대구 경북지역의 사람만 아니라, 한국인 전체를 대상으로 공항 근처의 호텔에서 강제 자가격리하도록 되어가고 있습니다. 성경에 요셉과 마리아는 헤롯왕을 피해서 애굽으로 피신해 있었는데,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을 때까지 애굽에서의 고통스러운 시간들을 참아야 했습니다. 그들이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은혜의 예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지금 어려움 속에 있는 모든 지체들에게 은혜의 주님이 함께 하심으로 잘 이겨내고 극복하며,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그리고 하나님이 행하시는 모든 일들 속에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완전히 이루어지도록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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