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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천사랑의교회

2009-10-14 수요설교 - 방언에 대해서 -1 (고전14:1-14)

최민환2015.11.25 12:41조회 수 255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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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4장은 결코 쉽지 않은 말씀이다. 주석서마다 모두 다른 해석을 하고 있고, 일치하게 말하는 신앙서적도 거의 없다. 저마다 해석이 다르다. 우리가 14장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12-13장을 반드시 참고해야 한다. 왜냐하면, 12장부터 14장을 잘 읽어보시면 알겠지만, 12장과 13장은 14장을 설명하기 위한 준비작업이기 때문이다. 12장은 은사의 본질을 설명하고 한계선을 분명히 그어주는 설명이 나와 있다. 그러므로 12장과 13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14장의 내용을 왜곡하여 이해할 수 밖에 없게 된다. 바울은 고린도에 발생한 방언의 폐단, 즉 잘못을 지적하기 위해 12장-14장에 걸친 긴 내용을 기록했다. 그것이 기록목적이다.

 

12장의 핵심은 첫째, 모든 은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둘째, 은사는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주어진다. 셋째, 그러므로 은사는 성령의 뜻에 따라 주어지는 것이지 우리가 구한다고 다 주시는 것이 아니다. "다 방언하는 자겠느냐? 다 예언하는 자겠느냐?"라는 말씀이 바로 그 뜻이다. 12:11절에 "그의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시는 것이다."라고 하셨다. 은사는 하나님의 주권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사모할수는 있으나 주시는 권한은 하나님께 있다. 넷째, 방언이 결코 최고의 은사가 아니다. 바울이 의도적으로 가장 중시한 은사는 지혜의 말씀이고, 의도적으로 가장 낮게 평가한 은사가 방언이다. 왜냐하면 고린도교인들이 방언을 최고의 은사인양 서로 다투고 싸웠기 때문이다. 사실 은사에는 등급이란 것이 없다. 하나님이 쓰시고자 하는 목적대로 나눠주시기 때문이다. 사람의 욕심을 따라 주시는 것이 아니다. 은사란 타인을 섬기도록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다. 12장부터 14장까지 사도바울이 가장 강조하는 은사는 "선생, 교사"가 되는 것이다. 즉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이다.

 

이러한 바탕위에서 14장이 해석되어야 한다. 우리가 14장을 해석하기에 앞서 특별히 주의해야 할 단어는 "사모하라"는 단어이다. 14장의 처음과 마지막 부분인 39절에 사모하라는 표현이 반복해서 들어가 있다. 사모하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고 은사를 달라고 떼를 쓰라는 표현이 아니다. 여기서 사모하라는 말의 뜻은 "하나님의 사랑을 바탕으로 남을 세우고 돕는 일"을 사모하라는 뜻이다. 은사를 사모하라는 뜻은 교회를 더 섬기고 더 세우기를 사모하라는 뜻이다. 교회를 세우기는 커녕 지금 고린도교회를 혼란스럽게 하는 방언보다는, 교회를 확실하게 세우는 예언을 더 사모하라는 말씀이다. 예언을 사모하라는 말씀은 개인적인 것보다는 교회를 세우는 일에 더 관심을 가지라는 말이다.

 

14장에 나타난 방언에 대해 몇가지만 말씀드리고 부족한 부분은 다음시간에 보충하겠다.

첫째, 방언은 사람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하는 것이다. 영으로 비밀을 말하는 것이다.(2)

여기에 방언의 본질이 들어있다. 방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여러분은 방언이란 것이 내 속의 비밀을 말하고 싶을 때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도록 방언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렇지 않다. 저도 예전에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영으로 비밀을 말하는 것이라는 말씀을 잘못 해석했기 때문이다. /만약 방언이 여러분의 비밀을 하나님께 은밀히 기도하는 것이라면 그것을 통역하면 안되겠죠? 사람들이 듣고 시험에 들겠죠? 그래서 우리는 누군가 내 방언 통역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것은 말씀을 잘못 이해했기 때문이다. 방언은 우리의 마음을 비밀히 전달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한다. "내 영은 비밀을 하나님께 털어놓고 싶어해. 내가 가진 아픔들, 내가 가진 고통들을 나의 영이 하나님께 쏟아놓고 싶어하는 것이 바로 방언이고, 영의 기도야." 만일 방언이 여러분의 아픔을 하나님께 말하는 여러분의 영의 기도라면 그것을 통역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런 내용을 공중에서, 그것도 예배시간에 통역해요? 그건 아니다. //그렇다면, 사도바울이 27-28절에 교회에서 방언할 경우 방언을 통역하라고 한 이유는 무엇인가? 5절 하반부에 이런 말씀이 있다. "만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14장 전체에서 바울은 예언의 은사를 가장 중시하고 있다. 교회를 세우는 일에 가장 필요한 것이 예언이라고 강조한다. 그런데 방언이 통역되지 않으면 예언만 못하다고 말한다. 이 말을 반대로 하면, 방언이 통역되면 예언만큼 중요한 것이 된다고 말씀하는 것이다. 방언이 통역되면 모든 사람들이 듣고 아멘할 정도로 모두에게 예언의 은사같은 기능을 발휘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방언을 통역해야 한다는 것이다. 통역이 없으면 교회에서 잠잠해야 하라고 바울이 명령하는 이유가 그것 때문이다. ===> 그렇다면 방언은 무엇인가? 방언은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하는 것이다. 즉 내가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인 성령께서 하나님과 교통하며 교제하는 것이 방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내용을 통역하면 예언과 같은 역할을 수행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방언을 자주 할수록 내 영혼안에 성령께서 계속 활동하시기 때문에 나에게 영적으로 유익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통역되지 않으면 나에게만 유익이 될뿐, 타인에게는 전혀 유익이 안된다. 이것이 4절에 방언이 자기의 덕을 세운다는 말씀의 뜻이다.

 

문제는 진짜 방언을 할 경우는 그렇다는 것이다. 가짜 방언은 처음에는 막 열심히 하다가도 나중에는 흥미를 잃고 흐지부지해 지게 된다. 방언을 은사라고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용하지 않으면 없어진다고 성경 어디에 말씀하고 있는가? 그런 소리는 모두 방언하는 사람들의 주관적인 체험이야기인데, 그것은 전혀 성경적이지 못하다. //은사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하나님이 하실 일을 하시는 것이다. 인간이 하고 싶을 때는 하고, 하고 싶지 않을 때는 안하게 되어 사라지는 그런 것이 아니란 말이다. 그런데 그것을 오해하기 때문에 방언을 마치 자기가 관리해야 하며, 조종하며 심지어는 방언을 전수해 줄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은사를 주신 성령의 주권을 망각한 아주 위험한 사상이다. 방언은 은사이지, 기술이 아니다. 내가 어떻게 할수 있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하나님의 깊은 섭리를 따라 그것을 사용하도록 하나님께서 역사하신다. 그럴 때 하나님이 영광받으시는 것이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둘째, 방언은 모두에게 주시는 것도 아니고, 구하면 다 주시는 것도 아니다.

방언을 구하면 누구에게나 주신다고 하는 말씀이 성경에 어디 있는가? 없다. 그런데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그것은 바로 5절에 나와있는 사도바울의 말을 잘못 이해했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가 다(모두, 전부)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이것을 오해하여, 하나님도 우리가 다 방언말하기를 원하는데, 우리가 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시지 못한다는 식으로 확대해석한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식으로 말한 것이 아니다. 바울의 말은 마치 "여기 있는 모두 다 1등했으면 좋겠네요."라는 말과 같다. 모두가 1등하는 경우는 없겠죠? 그럴수 없다는 말이다. ====> 12:30을 보라.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 무슨 말인가? 모두가 방언을 말하지는 못한다는 뜻이다. 왜? 방언은 하나님이 그 뜻대로 주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12:8-11을 보라. "어떤 이에게는" 즉, 사람마다 은사가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씀이다. 그리고 11절을 다 함께 읽어보자.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주시는 것이니라." /"그의 뜻대로." 성령님의 뜻대로 주신다는 것이다. 여기서 성령님의 뜻대로 주신다는 말씀은 마음 내키는 대로, 우리가 간절히 사모하면 주신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목적을 따라 우리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다는 뜻이다. 우리가 아무리 사모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목적과 뜻대로 주신다. ==> 그러므로 5절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너희 고린도교인들아, 너희들이 방언 받기를 간절히 원하는데, 나도 너희가 모두 방언을 했으면 좋겠다. 그러나 다 방언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라는 뜻이다. =====> 그러므로 오늘날, 방언이 학습과 훈련을 통해 습득가능하다고 가르치는 것은 올바른 가르침이 될수 없다. 조르고 떼를 쓰면, 혀를 굴리면 방언을 할수 있다는 것은 12장에 언급된 성령의 뜻대로 주신다는 하나님의 주권을 정면으로 배격하는 것이다. 성령의 은사는 선물이다. 선물이 학습과 훈련으로 주어진다면 그건 선물이 아니라 댓가이다. 은사의 주권자와 주관자는 성령님이시다.

오늘날 방언전문가들이 전국을 순회하면서 사람들에게 방언을 하도록 유도하는 일들이 있는데, 여기서 오해가 많이 생기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께서 어떤 이들을 사용해서 우리로 하여금 사모하며 방언을 구하게 하는 기도를 하게 하신다. 그러나 모두에게 주시는 것도 아닐뿐더러, 마치 자신과 몇시간만 함께 하면 된다는 식으로, 자신이 방언의 전수자가 된다는 것은 위험한 사상이다. 단체로 방언을 받는 경우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해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표적이 되게 하시려고 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연습이나 훈련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저 방언받기를 사모하며 기도할 때 하나님이 하나님의 목적과 뜻에 따라 주시는 것이다.

 

 

셋째,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하라.

13절의 말씀에 의하면 방언말하는 자가 직접 통역을 할수도 있음을 말씀한다. 그런데 또한 27절에 보면, 방언을 할 때에는 반드시 2-3명이 차례대로 질서를 지켜 방언을 하되, 옆에서 한 사람이 통역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통역이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14장 전체 말씀에 의하면, 방언은 남이 통역해 줄수도 있고, 내가 직접 통역할수 있다는 말이다.

===> 그런데 문제는 통역에 있다. 통역의 은사 역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사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자의적으로 자기 방언을 해석한다. 하나님이 자기 마음에 그런 내용을 떠오르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스운 상황이 나타난다. 어떤 은사주의 교회에서는 한 사람이 방언을 했는데, 통역의 은사를 가졌다는 사람이 두 사람이 그의 방언을 통역했다. 문제는 두 사람의 통역이 모두 달랐다는데 있다. 한 사람의 방언에서 어떻게 다른 통역이 나올 수 있을까? 그들은 주장하기를, 자기들에게 맞는 해석을 각각 주셨다는 것이다. 그건 엉터리이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고, 회전하는 그림자가 없으시다. 이 사람에게는 이 말을 하시고, 저 사람에게는 저 말을 하지 않으신다. 결론은 뻔한 것이다. 통역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 엉터리이든지, 아니면, 애초에 방언을 한 사람이 가짜 방언을 한 경우이다. 그러므로 방언을 하는 분들은 가능한 방언을 통역할수 있는 은사를 달라고 기도하기 바란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종합해 볼 때, 방언은 성령님의 좋은 은사이지만, 그것의 효율성은 자기의 신앙에만 도움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공예배에서는 바람직한 것이라고 볼수 없다. / 단, 통역의 은사가 있는 사람이 있을 때 예배시간에 방언을 말해도 된다. 그러나 통역의 은사를 가진 사람이 없을 때는 예배시간에는 방언을 절제하고 잠잠하라고 말씀하신다. 예배시간에 통역할 사람이 없는데도 절제할 수 없다면 그것은 성령께서 주신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은 성경의 규정을 어기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령님은 말씀의 권위를 넘어서지 않으시는 분이다. 말씀을 어겨가면서까지 예배시간에 방언을 하는 것은 거짓방언이다.

 

우리는 지금도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모든 은사를 주실수 있음을 믿어야 한다. 그리고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은사를 인정해 주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바울의 경고와 같이 은사로 인한 다툼과 자랑을 금하고, 성경의 말씀대로 주의해야 한다. 은사 때문에 다툰다면 그것은 사탄이 좋아할 일이다. 사탄은 우리가 분열되기를 원한다. 사탄의 노리개가 되어서는 안된다.

 

바울이 13장을 쓴 기록한 목적은 사랑이 있어야 은사가 은사답게 되기 때문이다. 방언은 개인적으로는 유익하지만, 교회를 세우거나 남을 유익하게 하는데는 불완전하기 때문에 통역이 없는 방언은 잠잠하게 한 것이다. 개인적으로 방언을 할수 있기를 구하라. 그러나 다른 은사들을 더욱 열심히 사모하고 구하라. 특별히 교회에 덕을 세울수 있는, 타인을 섬길수 있는 은사를 구하기 바란다. 특별히 사도바울이 14장에서 계속 강조하는, 다수를 유익하게 하는 예언의 은사, 또는 가르침의 은사, 즉 교회를 세우는 교사의 은사를 달라고 구하시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란다. 여러분을 통해 우리 심천사랑의 교회가 날마다 부흥하고 세워지기를 소망한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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