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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천사랑의교회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07년 10월 셋째주 설교)

두목사2007.10.24 16:21조회 수 2106추천 수 163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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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0/21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창세기17:1-8

어떤 한 젊은이가 아주 유명한 코치의 눈에 들어서 큰 뜻을 품고 운동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 젊은 선수는 일취월장하여 한순간에 주목받는 선수로 발돋음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얼마있지 않아서 두사람은 아주 심한 갈등을 빚게 되었는데, 그것은 이 선수가 어느 여자를 만나서 사랑에 빠지게 된 것이었습니다. 연습에 점점 소홀하다가 급기야는 운동을 손에 놓고 만 것이었습니다. 코치는 그 선수를 만나서 여러차례 권면을 했습니다. “네 뜻은 더 큰데 있지 않느냐? 지금 여자를 사귄다고 운동을 그만두면 어떡하느냐?”며 수차례 권고했지만, 한번 여자에 빠진 그 선수는 충고를 들으려고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사생활에 코치가 지나치게 간섭한다며 코치를 떠났다고 합니다.

우리가 요즈음 만나고 있는 아브람 역시 수많은 사람중에 하나님 눈에 들어서, 복의 근원이 되게 하려고 택함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바빌로니아(갈대아)우르에서 가나안으로 데려오셔서 보호해주시고, 축복해 주셔서 큰부자가 되고, 또 롯구출사건을 통해 주위 이웃들과 주변나라로부터 강하고 존귀한 자로 인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한가지 자식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끝까지 믿고 기다리지 못한채, 하갈과의 사이에서 이스마엘을 낳게 됩니다. 다같이 창세기16장 16절을 봉독하겠습니다. “하갈과 아브람 사이에 이스마엘이 태어날 때에, 아브람의 나이는 여든여섯이었다.”(창16:16) 그는 믿음생활 10여년만인 86세에 믿음으로 하나님을 끝까지 바라보지 못하고, 인간적 방법을 사용하여 자식을 낳고 말았습니다. 문제는 이로부터 13년간,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침묵하셨다는 것이었습니다. 17장 제일 처음 무엇으로 시작합니까? “아브람의 나이 아흔아홉이 되었을 때에, 주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다.”(창17:1) 성경은 86세에서 99세사이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타난 기록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기록이 없습니다.

그전에 약 10년간은 하나님과 아브람은 아주 친밀한 관계였습니다. 창세기 12장이후,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직접 말씀하시고(창12;1), 나타나셔서 말씀하시고(창12:7), 아브람이 이집트로 가서 부인 사래를 누이로 속여 곤경에 처할때에됴, 바로집안에 무서운 재앙을 내려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특별한 관계였습니다. 또 롯을 떠나보내고서 멍하니 서있는 아브람에게 하나님은 찾아오셔서, 어깨에 손을 얹고 위로와 용기를 북돋우어 주셨으며, 아브람이 조카 롯을 구출해 낸 뒤에 두려움에 떠는 아브람에게 찾아가서 ‘두려워 말라. 나는 네 방패가 되어주겠다. 네가 받을 보상이 매우 크다’며 힘과 용기를 주신 친밀한 관계였다.

이렇게 가까웠던 하나님. 그 하나님이 한순간 관계를 단절하고, 13년동안 아브람에게 침묵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침묵에 대해 아브람은 처음에는 그다지 못느꼈을 것입니다. 여종 하갈이 임신을 했고, 부인 사래와의 갈등을 빚다가 하갈이 가출하였을때, 주님은 하갈에게 찾아가 주셔서 하갈이 집으로 돌아오도록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속으로 ‘역시 하나님은 내 편이야! 내가 어떻게 하든 다 이해해 주시고 도와주셔‘하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다 이스마엘이 태어나게 되고, 86세에 얻은 그 아들이 얼마나 예뻤겠습니까? 이스마엘의 재롱에 흠뻑 젖어서 시간가는 줄 모르고 지냈을 것입니다. 그런데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면서, 뭔가 허전한 것입니다. 이전에는 이맘때쯤 하나님께서 오셔서 ’아브람아‘하고 불렀는데, 도통 나타나시지를 않는 것이었습니다. 3,4년이 지나면서 그는 옛적 친밀했던 하나님이 너무나 그리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한번 불러 보았을 것입니다. “하나님! 어디계세요? 하나님! 하나님!” 그러나 하나님은 아무 응답이 없었습니다. 그제서야 그는 알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전에 날 대하던 하나님이 아니시구나. 이전에 하나님은 내가 부르기 전에 찾아와 주셨고, 내가 물을 때 응답해주셨고, 인격적으로 만나주셨는데, 이제 난 하나님의 버림을 받았구나. 왜? 왜 버림을 받았을까?? 언제부터 하나님을 난 만나주시지 않는걸까? 그는 가만히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랬더니, 창세기 16장 처음 아내 사래의 말을 듣고 하갈과 동침하면서부터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나타나지 않은 것이 생각이 났습니다. 아브람은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쪼갠 짐승사이로 불이 지나가는 언약식을 행하면서까지 하나님의 약속이행을 확인시켜주며 믿음으로 인내할 것을 말씀하셨는데, 그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인간적 방법을 사용하였던 것입니다. 그에게 죄책감이 밀려왔습니다. 회한이 찾아왔습니다. 그런데도 이제 어떻게 이스마엘을 물릴 수도 없는 상황에 놓여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시간이 흘러 흘러 10년이 넘어서면서, 하나님과 만났던 그 일들은 추억으로, 하나님과 약속했던 그 약속들은 전설로 변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뭔가 답답하고 뭔가 막힌듯한 느낌이 그를 짓누르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경험이 없었습니까? 사람이 하나님과 교제하지 못할 때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실 때, 다른 피조물과 다르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시고 생명의 기운을 불어 넣으셨습니다. 즉. 하나님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교제할 때에만 참 행복을 느끼도록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철학자 파스칼은 ‘하나님은 인간 안에 하나님으로만 채워져야 하는 공간을 만드셨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편6편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더러 주님에 대해 말하라면 ‘하나님은 나의 주님, 주님을 떠나서는 내게 행복이 없다’하겠습니다” 아브람이 그런 상태였습니다. 자신을 특별히 택하여 사랑하여 주신 그 하나님의 약속을 인내함으로 기다리지 못하고, 주님을 떠나 인간적인 방법을 사용했을 때, 그는 하나님과 단절되고 더 이상 행복을 느낄 수가 없게 된 것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문제앞에서 일시적인 해결을 위해, 만족을 위해 하나님이 말리고 또 말리는 하나님의 뜻과는 다른 방법을 사용했을 때, 우리는 그 순간에는 해결을 보는 것 같고, 만족을 얻는 것 같으나, 하나님과 단절이 되면서 우리를 내버려두시는 하나님의 침묵으로 인해, 깊은 영적 어두움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징계의 채찍이 무섭습니까? 무관심, 다시말하면 내버려두시는 하나님의 침묵이 무섭습니까? 비행청소년들을 조사해보면, 많은 수가 이 무관심에 버려진 아이들입니다. 이들은 이렇게 호소를 합니다. ‘무시하지 말고 차라리 때려주십시오.’라고. 히브리서12:5,6을 보면“내 아들아, 주님의 징계를 가볍게 여기지 말고, 그에게 꾸지람을 들을 때에 낙심하지 말아라.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사람을 징계하시고,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신다” 사람도 그렇지만, 하나님도 사랑하는 사람에게 징계와 채찍질로 바른길로 인도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이 혹시 살면서 하나님의 채찍질을 경험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너무나 아픕니다. 좀 봐주시지. 이렇게까지 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채찍질 하신다는 것입니다. 관심이 남아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나 또 한가지 우리가 알아야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내어버려 두시기도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로마서1:18~32까지 보면, 하나님의 내버려두심에 대해 나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해드리거나 감사를 드리기는커녕, 오히려 생각이 허망해져서, 마음이 어두워지게 될 때(21절), 하나님은 사람들이 마음의 욕정대로 하도록 더러움에 그대로 내버려 두시니, 서로의 몸을 욕되게 하였습니다(24절).또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부끄러운 정욕에 내버려 두셨으며(27절), 사람들이 하나님을 인정하기를 싫어하므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타락한 마음자리에 내버려 두셔서, 해서는 안될 일을 하도록 놓아 두셨습니다.(28절) 그리하여 이들은 마음껏 죄에 노출된 채로 살아가게 됨을 29절이하에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언제까지나 우리에게 관심이 있어서 우리가 찾을 때마다 우리를 만나주시는 분으로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믿음가운데 온전히 서있지 못하고, 하나님의 거듭되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순종하지 않을 때, 우리를 그대로 내버려두시고 만나주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입었지만, 하나님을 끝까지 믿고 인내하지 못하고 인간적 방법으로 자식을 낳음으로 인해, 하나님의 내버려두심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13년. 참 긴시간입니다. 아브람은 이 긴 시간동안 하나님과 단절되어 진정한 행복과 거리가 먼 메마른 인생을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날, 하나님은 아브람을 찾아오셨습니다. 다같이 17장 1절을 봉독해봅시다. “아브람의 나이 아흔아홉이 되었을 때에, 주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나에게 순종하며, 흠없이 살아라.’” 여기서 ‘나타나셨다’고 할 때, 그 앞에 ‘드디어’를 붙여서, ‘드디어 나타나셨다’라고 한다면 더 의미가 맞다고 하겠습니다. 3절에 보면 아브람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있게 됩니다.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요? 얼마나 감격스러웠을까요? 옛날 TV드라마를 보면 왕이 여러 첩들을 거느리다가 까맣게 잊던 한 첩에게 찾아가게 될 때, 너무 기쁘고 감격해서 고개를 바닥에 떨어뜨린 채 머리를 못드는 장면을 연상케 합니다.  정말 눈물겨웠을 것입니다. 그렇게 찾아오신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나에게 순종하며, 흠없이 살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3년만에 찾아와서 하신 첫 말씀이 이 말이었습니다. 왜일까요? 무슨 의미일까요? 아브람이 순종하지 않았고, 흠있는 모습이었기 때문에, 그동안 아브람을 만나주지 않았다는 것을 분명히 확인시켜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하나님께 믿음으로 순종하며 흠없이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를 다른 번역본을 참조하다보면, NIV영어성경에서 그 의미가 잘 나타나있습니다. “Walk before me and be blameless" 하나님앞에서 걸어가라. 걸어가라고 말하는 동사 ‘하락(히브리어)’은 걷는다는 의미도 있지만 ‘산다’는 의미를 가진 동사로서 반복의 의미를 담고 있다. 즉 하나님 앞에서 계속하여 동행하며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며 살아가야할 것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을 바라보지 말고, 환경과 세상원리에 흔들리지 말고 믿음으로 끝까지 살아가야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아내 사래의 말을 따라 하갈을 취하였고, 하갈을 취한 것이 그당시 사회풍습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결코 사람에 의해 움직이거나 세상가치관에 따라 행하지 않는다는 것을 가르쳐 주며,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살아갈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 사실 우리는 이렇게까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대로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갖는다. 또 아브람에게 너무 심한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냐는 생각을 합니다. 과연 심한 요구일까요? 본문4~6절을 보면 아브람의 이름이 아브라함으로 개명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브람은 ‘존귀한 아버지’ ‘높은 아버지’라는 뜻이고, 아브라함은 ‘열국의 아버지’ ‘많은 나라들의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리 심하게 보이는 요구를 아브람에게 하시는지를 알게 하는 부분이 바로 이 이름을 바꾸는 것입니다. 이름에는 그 사람의 미래를 담고 있습니다. 아브람은 단지 몇 사람에게 존귀한 자로 세상가운데 높임받기 원했지만, 하나님은 아브람을 아브라함이란 이름으로 바꾸면서, 가족과 민족의 국경선을 넘어 많은 민족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자로의 아브라함을 향한 놀라운 계획을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어쩌면 평범한 가장으로서 행복한 가정을 꾸미고, 세상에서 적당히 인정받고 살면 최고로 생각 했을 런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아브라함이 세상가운데 모든 민족의 아버지로서 영향력 있는 자가 되게 하시길 원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완전한 믿음의 세계로 인도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생각하는‘나’와 하나님이 생각하는‘나’가 틀립니다. 나는 밥그릇 정도면 되는 것 같은데, 하나님은 우리가 큰 드럼통이 되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그 계획을 가르쳐 주시려고 이름을 바꾸어주시는 것입니다. 이름을 바꾼다는 것은 미래가 장래가 바뀐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지금까지 추구해왔던 인생행로에서 방향을 틀어서, 새이름에 맞는 방향으로 바꾸어 새롭게 출발함을 의미합니다. 어떤 사람이 가게를 운영했는데 잘되지 않았다고 합시다. 그래서 내부장식도 고치고 물건도 새롭게 갖다놓고 이름도 새로 지어 붙입니다. 여기에는 새로이 출발한다는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이름을 바꾸시며 새롭게 출발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6개월전 우리교회는 심천섬기는교회에서 심천사랑의교회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섬기는교회라는 이름을 너무나 사랑하였고, 자랑스러웠습니다. 주님처럼 섬기는 교회임이 자랑스러웠습니다. 돌아보면 부임한지 약 8년동안 섬기는 일을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교민들을 섬기려했고, 수많은 중국인들과 장애인들을 섬겼으며, 베트남에까지 가서 섬길 수 있었습니다. 한때는 이런 말도 들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심천에 와서 교회를 다니지 않고 힘들어하니까, 비기독교인이 하는 말이 왜 아직도 그러고 있느냐며 심천섬기는교회에 가면 도움을 받을 수 있을거라는 말을 들었다며 교회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말을 듣기까지 섬기려고 애를 써왔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섬기는 일에 너무 매이면서, 소중한것, 중요한것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에 섬겼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랑은 점점 잃어가고, 섬기는 일에만 집중하게 되면서, 사랑없는 섬김을 하게 된 것입니다. 사랑없는 섬김은 노동으로 변했고, 섬기지 않는 자를 정죄했고, 섬기는 자들이 교만하게 되어 예수님의 사랑의 섬김과는 판이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교회에 새이름을 주셨습니다. 심천사랑의교회. 왜 사랑의교회라고 했을까요? 여기서 사랑은 아가페사랑을 말합니다. 먼저는 하나님의 아가페사랑을 많이 받으라고 이 이름을 주셨습니다. 두 번째로 우리도 하나님을 아가페사랑으로 사랑하라는 의미이며, 세 번째로 하나님의 아가페사랑으로 다른 사람들과 세상을 섬기라고 더 큰 계획 속에 이 이름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이 이름에 맞게 새 출발할 수 있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찾고 찾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에 흠뻑 젖읍시다. 그리고 우리도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합시다. 그리하여 그 사랑으로 우리 주위의 한국인들과 중국인들 더 나아가 세계 모든 민족을 사랑하며 섬깁시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처럼 모든 민족의 아버지된 교회가 되어 아름답고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전능한 하나님을 만나보겠습니다. 13년 만에 아브람에게 나타난 하나님은 자신을 ‘전능한 하나님’(히. 엘 샤다이)이라고 계시하고 계십니다. 전능이란 말 그대로 ‘모두다 할수있다’ ‘못할일이 전혀없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에게 못할 일이 있습니까? 성경의 첫 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창1;1)부터 전능한 하나님을 소개하기 시작하여 성경 안에는 전능한 하나님이야기로 가득합니다. 예레미야에게 나타난 하나님은 “나는 주다. 모든 사람을 지은 하나님이다. 내가 할수 없는 일이 어디 있겠느냐?”(렘32;27)고 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가운데 계십니다. 하나님은 못할 일이 전혀 없으십니다. 모든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자신이 ‘전능한 하나님’임을 말씀하셨을까요? 하나님을 온전히 믿지 못한 아브람에게 믿을만한 존재이심을 다시한번 천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은 바로 앞에서 말한대로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갈 때’ 경험할 수 있음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그리고 오늘의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흔들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똑바로 걸으라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가다가 사람에 의해 흔들리고, 환경에 의해 흔들리고 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을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걸어갈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믿음의 현주소는 어떻습니까?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믿음의 길에서 미끄러져서 인간적인 방법을 사용하고 계십니까? 이 시간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믿음의 길에서 벗어난 그곳에서 돌아와 믿음으로 승리의 삶, 축복의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온전한 믿음의 길을 걸음으로 여러분의 삶 가운데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타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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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게하시는 하나님(07년 12월 셋째주 설교) (by 두목사) 예수님의 가족 개념(마태복음 12:46-50, 2005.2.13) (by 두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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