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이해되지 않는 상황 속에서
본문: 출 4:18–26
모세의 아내 십보라는 미디안 제사장의 일곱 딸 중 한 명으로, 모세가 그녀를 만났을 때 그녀는 자매들과 동네 양치기들과 물을 놓고 싸우고 있었습니다.
보통 드센 여자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십보라의 아버지가 미디안 제사장이기는 하나, 그렇다고 그녀가 하나님에 대해 잘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하나님께 사명을 받고, 그 일을 상의한 대상은 아내 십보라가 아니라 장인 이드로였습니다.
모세는 이 중요한 일을 아내와 상의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모세가 이 일을 아내와 상의하였다면, 모세는 애굽으로 출발조차 못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출발을 했는데, 그 여정 중 숙소에서 하나님에게 죽임을 당할 위기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 모습을 보는 아내의 입장은 어떻겠습니까?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40년 만에 고향 애굽으로 가족을 데리고 떠나왔는데, 그 하나님 손에 죽을 수도 있는 상황에 처한 남편의 모습이 공포스러움과 함께 또 얼마나 한심해 보이겠습니까?
그리고 그 문제의 원인이 자신의 자녀에게 할례를 베풀지 않았음에 있다는 것을 바로 깨달은 십보라는 돌칼을 가지고, 자기 자녀의 생식기에서 표피를 끊어 들고 와서, 그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손으로 남편의 발에 대었다고 기록합니다.
성경에서, 애굽으로 내려갈 때 아내와 아들들이라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아마도 이 때 두 명 이상의 아들의 포피를 베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순간 십보라는 무슨 마음이었겠습니까?
막연하기만 하던 하나님, 막연하게만 느껴지던 남편의 사역의 길에 동참한다는 것이 현실로, 피부로 와 닿는 순간 아니겠습니까?
인생의 기억 중에 그 장면의 냄새, 그 장면의 촉감까지 다 느껴지는 생생한 순간들이 있습니다.
십보라에게는 이 순간이 바로 그런 순간입니다.
막연하게 ‘나도 하나님을 믿어’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남편을 따라 나셨을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 가운데에서도 주변 사람들이 하나님을 잘 믿으면, 나도 그 틈에서 믿음 좋은 사람처럼 생각하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다 인생의 고비와 문제를 만나는 순간, 실질적인 내 믿음의 민낯을 대면하게 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십보라가 그런 것입니다.
이 사건 속에서 십보라는 살아계신, 부인할 수 없는 하나님과 대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건 속에서 그녀가 해야 했던 일은 남편을 살리기 위해, 사랑하는 아들들의 살점을 돌칼로 끊어내는 것이었습니다.
생명이 걸린 다급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모세가 40세에 결혼하여 지금 80세가 되었으니, 모세의 아들들이 못해도 청소년 또는 청년의 나이일 것입니다. 그런 아들의 생식기를 보아야 하고, 직접 잘라야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겠습니까?
이 모든 상황 속에서 생각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자신들의 죄의 대가가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를 피부로 느끼는 순간이 있었습니다.
범죄함으로 에덴에서 쫓겨나기 전, 하나님은 양을 잡아 그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혔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때, 만들어 입히셨다는 가죽옷이 어떤 옷이었겠습니까?
손질된 옷이겠습니까?
잘 다듬어진 옷이겠습니까?
‘날 것’ 그대로의 가죽을 뒤집어 쓰는 것 아니겠습니까?
상상을 해 보십시오.
이 순간에 하나님은 바로 그 자리에서 양을 잡아 그 가죽을 벗기셨을 것입니다.
동물의 가죽을 벗길 때의 끔찍함이 있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마르지 않은 핏자국과 온기가 남아있는 그 가죽을 아담과 하와에게 입히시는 것입니다.
좀 더 심하게 상상을 해 본다면, 만약 여러분 옆에 어떤 동물이 있는데, 그 동물을 죽이고 그 동물의 가죽을 벗겨 곧바로 여러분에게 입힌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 느낌을 누가 잊을 수 있겠습니까?
이는 부끄러움을 가리는 옷의 느낌이라기보다 더 끔찍한 경험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느낌은 자신들의 죄에 대한 기억과 함께, 머릿속에서 결코 잊혀지지 않는 생생한 기억이 되었을 것입니다.
십보라가 그런 것입니다.
이 순간의 모든 사건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기억하게 하는 생생한, 부인할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한 기억으로 기억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러한 순간이 필요합니까?
이제 그의 남편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사역자로서 하나님께 드려진 삶을 살아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남편을 아무런 마음의 준비 없이 따라 나온 아내와 아들들입니다.
그들에게 이 사건은 충격임과 동시에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할 사람으로 이들을 변화시키는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편을 향해 피 남편이라고 하는 십보라의 고백은, 하나님을 경험하는 십보라가 인식하게 되는 하나님에 대한 날 것 같은 표현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모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지금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지난 40년 동안 모세는 하나님을 떠난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애굽에서 사람을 죽이고 도망친 모세는 더 이상 애굽 사람도 이스라엘 사람도 아닌 것입니다.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 사람과 같은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누구에게도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할 수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 모세이기에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는 모세는 사람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에게도 버림받았다.’ 생각하며 살아왔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없이 40년을 살아온 사람입니다.
그런 모세가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런 순간에 아직 준비되지 못한 부분이 이 가족의 문제인 것입니다.
종종 가족의 동의 없이 사역자로 헌신한 분들이 사역자로 훈련받는 과정에서, 가족으로 인해 어려움을 당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모세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더 더욱이나 이스라엘 사람들 눈에 모세는 이스라엘 사람으로 인정할 수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야.’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서로 공감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모세가 이방 사람인 아내까지 데리고 와서 민족을 이끄는 지도자가 되려 한다면, 사람들이 얼마나 말이 많겠습니까?
그런 상황에서 아내와 자녀들이 준비되어 있지 않다면, 그 사역은 몇 배로 힘이 든 사역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건을 통해 아내도 또 그 자녀도 하나님을 부인할 수 없는 체험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이해되지 않는 행동을 통해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만나기 전, 가족으로 인해 당할 수 있는
어려움의 요소를 제거해 주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살다 보면 내가 100번을 이야기해도 이해시키거나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예기치 못했던 사건이 그 설명을 대신해 주는 경험을 할 때가 있습니다.
모세가 그런 것입니다.
모세가 100번 이야기해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하나님께서 한 번에 해결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우리의 생각으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천천히 믿음으로 바라보면, 그 속에서 하나님의 깊고 세밀하신 뜻을 발견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런 순간 우리가 고백하는 것이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라는 것입니다.
그런 은혜가 성도 여러분의 삶에도 있기를 바랍니다.
지금 당장은 이해할 수 없지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처럼, 지금의 우리의 상황 속에서도 선이 이루어져가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경험하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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