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안식 후 첫날 새벽에
본문: 마태복음 28:1–10
오늘 말씀에서 두 개의 문구를 묵상합니다.
첫째는 ‘안식 후 첫날’ 이라는 표현입니다.
세상은 역사를 BC와 AD로 나눕니다.
‘예수님 오시기 전’ 과 ‘예수님이 오신 후’ 로 세계 역사를 계산하는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BC와 AD보다 더 중요한 기준으로 ‘안식 후 첫날’ 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날을 기준으로 세상이 바뀌었습니다.
이날을 기준으로 죄인 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이날을 기준으로 사망을 이기었습니다.
이날을 기준으로 부활을 꿈꾸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지킵니다.
안식일은 하나님의 창조와 연결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의미가 있는 날입니다.
출애굽기 20장 11절에는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이날을 복 주었고 거룩하게 하였기에 우리가 안식일을 지킵니다.
반면 주일은 십자가에서 죽으셨던 주님이 다시 살아나심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주님은 다시 사심과 함께 우리 모두를 죽음에서 해방케 한 날입니다.
안식일이 한 주간의 수고 후에 쉬는 날로 주어졌다면, 주일은 한 주간의 시작하는 날로
주님 앞에 예배하고 나서 한 주일을 주님의 자녀로 산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주일은 역사 속에서 참 많은 도전을 받아 왔습니다.
세상은 우리가 모이는 것을 싫어합니다.
왜 싫어합니까?
만약 우리가 모였다 헤어졌는데,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누가 우리가 모이는 것을 걱정하거나 싫어하겠습니까?
문제는 모였다 흩어졌을 때, 세상을 향해 영향력을 미치기에 세상은 우리가 모이는 것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일이 한 주의 시작이라는 것의 의미가 큽니다. 예배 속에서 힘을 얻고 세상 가운데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주일이 성도의 삶의 기준이 되어,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셨던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가운데 임하게 하는 삶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 주일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함께 예배할 수 있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주일은 감격의 예배를 드리는 약속의 날로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찢어진 휘장을 열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그 감격으로 예배할 수만 있다면, 그 예배가 얼마나 기쁨과 감사로 가득하겠습니까?
두 번째 ‘새벽에’ 라는 단어를 주목하게 됩니다.
본문 1절에서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더니” 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한 장을 앞으로 넘겨보면, 27장 1절에는 어떻게 기록되어 있습니까?
“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 라고 기록합니다.
같은 새벽인데, 전혀 반대의 일이 일어나는 장면이 27장 1절과 28장 1절에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27장의 새벽은 미움과 증오가 가득한 새벽입니다.
새벽부터 모인다는 것은 부지런함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예수님을 잡아 죽이는 일에 부지런한 것입니다.
미움과 증오심으로 충만하여 이 일에 온 힘을 다하고 있습니다.
반면 28장 1절의 여인들은 안타까움과 사랑으로 가득하여 새벽에 모였습니다.
지금 이 여인들이 찾아가는 곳이 어디입니까? 무덤입니다. 오늘날의 공동묘지도 담력체험의 장소로 사용되는데, 그 옛날의 공동묘지라는 곳이 새벽에 찾아가기 쉬운 장소이겠습니까?
그럼에도 새벽 일찍 이 여인들이 모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향한 사랑 때문입니다.
비록 돌아가셨지만, 이 여인들의 마음은 여전히 예수님을 사랑함으로, 그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으로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 여인들이 마음의 두려움을 이기는 힘은 무엇입니까?
주님에 대한 사랑입니다. 사랑하면 가능합니다.
새벽에 예수를 잡아 죽이기 위해 열심인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같은 새벽에 예수의 시신이라도 보기 위해 나선 여인들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무엇을 위해 열심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무엇’ 이 중요합니다.
가치 있는 일에 열심을 내십시오.
오늘 우리의 열심은 무엇을 위한 열심인지를 돌아보기 바랍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일에 더욱 열심일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만약 이때, 이 새벽에 나선 여인들을 다른 사람이 보았다면 뭐라 하겠습니까?
어리석다고 말할 것입니다.
무덤은 봉인되어 있습니다.
군인들이 지키고 있습니다.
설령 군인들이 없다 해도 큰 바위가 그 무덤을 막고 있습니다.
여인들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여전히 널려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 여인들은 무덤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 행동이 어찌 보면, 대책 없는 행동입니다.
그럼 왜 이들은 이런 대책 없는 행동을 하고 있습니까?
오직 사랑하는 마음 하나 때문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무덤에 장사하고 돌아와 가만히 앉아 안식일을 보내자니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식일 규정이 해제되자마자 주님을 찾기 위해 이들이 나선 것입니다.
답도 없는 방법, 대책도 없는 행동이지만 사랑하는 마음이 가만히 있게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이러한 이들의 마음을 귀하게 보아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흔들어 그 돌문을 열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9절에 뭐라 말씀합니까?
“예수께서 그들을 만나 이르시되 평안하냐” 라고 말씀합니다.
두려움과 불안으로 가득하던 이들에게 주님이 평안을 말씀하십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도 두려움이 있습니다.
늘 미래에 대한 불안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자 하는 이들에게, 주님은 참 평안을 주실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마태의 이 기록이 또 한 가지 놀라운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인으로 두 명의 여인을 기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점이 왜 대단합니까?
여인은 증인으로서의 자격이 없던 시절이 바로 이 시대의 문화입니다.
그런 여인들을 주님 부활의 증인으로 내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시대적 가치관으로 보면 콧방귀가 나올 기록입니다.
‘아니, 여자가 무슨 증거로서의 힘이 있다고
이걸 이렇게 기록하나?’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마태가 이 두 명의 여인을 부활의 증인으로 삼는 것은
이를 통해 또 한 번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이 변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제는 가고 새로운 오늘이 왔음을 말합니다.
안식일이 아니라 주일의 세상이 열렸음을, 새로운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우리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주님과 함께 새로운 시대를 살아가는 놀라운 은혜의 체험들이 넘쳐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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