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주님을 보세요.
본문: 마태복음 26:69 - 75절
마태는 26장, 27장에서 예수님을 배반한 제자 베드로와 가룟유다의 이야기를 비교하듯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가룟 유다는 계획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배신하였습니다.
세밀한 계획까지 세워가며 주님을 배신합니다.
그는 가장 존경하는 이에게 하는 입맞춤의 행동을 통해, 예수를 군병들에게 넘겨 줍니다. 그리고 그 때, 가룟유다는 주님을 ‘랍비’ 라고 부릅니다.
다른 이들이 ‘주여’ 라고 부를 때, 가룟 유다만이 주님을 ‘랍비여’ 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물론 제자들도 주님을 ‘랍비여’ 라고 부른 기록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이들의 호칭은 랍비에서 점차 ‘큐리오스’ 주님으로 변해 갑니다.
마지막 만찬의 자리에서 주께서 너희가 나를 팔리라 하시는 말씀에
제자들은 하나 같이, “주여 나는 아니지요”(26:22)라고 대답할 때, 유독 가룟 유다만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25절) 라고 답하고 있습니다.
그랬던 가룟 유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파는 순간에도 ‘랍비여 안녕하십니까’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단어 속에서 가룟 유다의 예수님에 대한 인식을 볼 수 있습니다.
그의 성장하지 못하는 신앙이 이 단어 속에서 드러납니다.
가룟유다의 신앙이 성장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가시나무새’ 라는 노래의 가사처럼, 가룟 유다 안에 자신이 너무 강해서 주님을 받아들일 자리가 없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주님이 이 땅에 메시아로 오셔서 세상을 뒤집어 놓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올라와서 하시는 모습을 보니, 아닌 것입니다. 이렇게는 세상을 바꿀 수 없겠구나.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을 버리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던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자 바로 예수님을 버리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설득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혀 예수 그리스도에게 설득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가룟 유다는 유월절 그 밤에 예수 그리스도를 팔기 위해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요한복음을 13장 31절을 보면, “그가 나간 후에” 라는 말씀 이후로, 주님은 4장에 걸쳐 마지막 가르침을 제자들에게 들려주십니다.
새 계명을 말씀해 주시고, 주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심을 말씀해 주십니다.
보혜사 성령님에 대한 이야기와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 또 성령의 하시는 일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17장, 제자들을 위한 주님의 기도까지, 너무도 중요한 말씀들을 전해 주시는데, 가룟 유다는 이 모든 말씀을 놓치고 만 것입니다.
이 말씀을 보며 만약 가룟 유다가, 그 밤에 주님이 전해 주시는 이 말씀을 들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라는 안타까운 마음을
갖게 됩니다.
가룟 유다의 마음속의 예수 그리스도는 ‘랍비의 선’ 을 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안타깝게도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합니다.
‘여기까지는 내가 믿겠어. 그런데 그 이상은 이해가 안 돼.’ 라고 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결국 랍비의 선을 넘지 못하는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를 내 삶의 참 주인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럼, 누가 예수그리스도를 온전히 주로 고백할 수 있습니까?
그 랍비 이상의 주되시는 주님을 만날 때입니다.
좋은 선생으로만 생각했던 주님 앞에서, 간절함을 넘어 처절하게 복음의 의미를 깨닫는 경험을 한 사람이 주라 고백할 수 있습니다.
‘내 삶의 주인이십니다.’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도 아직 그 수준은 아니었습니다.
베드로는 거대한 문제 앞에서 무너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갑자기 훅 들어온 ‘너도 예수의 제자지!’ 라는 질문에 당황하여 예수님을 저주하며 부인하다, 닭의 울음소리를 듣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때, 아주 잠깐의 순간에 있었던 일을 4복음서 중에서 누가복음만이 기록합니다.
누가복음 22장 60절에,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아 나는 네가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고 아직 말하고 있을 때에 닭이 곧 울더라”
그 때 61절,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예수님이 어떤 눈빛으로 베드로를 보셨겠습니까?
원망이겠습니까?
책망의 눈빛이었겠습니까?
홍콩에 가면, 사틴 지역에 루터란 신학교가 있습니다. 그 신학교 체플실에는 특이한 십자가가 걸려있습니다.
은색이 나는 금속으로 만든 십자가인데,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이 십자가는 중국 내지에 있는 성도들이 선물한 십자가로, 그 지역 소수민족의 민속공예 기술로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처음에 이 십자가를 봤을때, 예수님이 너무 못생겼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눈이 마치 우리나라 장승의 눈처럼 보였습니다.
그런 십자가에 대해 루터란 신학교 학생들 사이에는 특별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자신의 상황에 따라 그 십자가 안의 예수님이 달리 보인다는 것입니다.
내 안에 부끄러운 부분을 가지고 예배에 참석하면, 그 십자가 안의 예수님이 자신을 노려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는 것입니다. 또 어떨 때는 지치고 상한 마음으로 예배에 참석했는데,
그 십자가의 예수님의 눈빛이 따뜻하게 느껴지는 경험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십자가가 특별하다 말합니다.
오늘 말씀 속에서 예수님이 베드로를 바라보는 눈빛은 어떤 눈빛이었겠습니까?
저는 개인적으로 위로의 눈빛이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베드로 괜찮다. 나는 네가 나를 부인해도 괜찮다. 이해한다.’
이 눈빛이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한 마디를 더 덧붙인다면, ‘죽지 마라.’
이 눈빛이었을 것 같습니다.
그 절망의 순간, 세상에서 숨어버리고 싶은 순간, 베드로라고 예외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베드로를 주님이 말로다 할 수 없는 눈으로 바라봐 주셨기 때문에 베드로를 살리고 계신 것입니다.
가장 안타까운 것은 가룟 유다는 그 주님의 눈을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베드로와 가룟 유다의 차이입니다.
실수할 수 있습니다. 실패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떠날 수도 있고, 주님을 원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그런 상황을 만난다 해도 한 가지, 주님을 떠나지는 마십시오.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그 주님의 눈길을 바라보십시오. 그것이 사는 방법입니다.
주님을 바라본 사람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그 처절한 낙심의 자리에서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참 다양한 상황 속에 계시는 성도 여러분, 주님을 보십시오.
나를 향한 주님의 눈길을 경험하십시오.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주님, 나를 바라봐 주십시오.’
‘랍비’ 에서 ‘주님’ 으로 예수그리스도를 새롭게 만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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