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화 있을진저
본문: 마 23 : 29 – 36
주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향해 ‘화 있을진저’ 라는 표현을
무려 7번이나 반복하시며 그들의 잘못을 지적합니다.
‘화 있을진저’ 라는 표현에 사용된 원어 ‘우아이’ 라는 헬라어는
‘화가 있다’ 는 표현과 함께 그 속에 슬픔과 분노의 감정을
포함하고 있는 의성어적 감탄사입니다.
의성어는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소리입니다.
그러므로 ‘화 있을진저’ 라고 번역한 주님의 말씀은, 다른 말로는 주님의 마음속에서부터 나오는 근본적인 마음의 소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국어 성경이 ‘화 있을진저’ 라고 번역한 이 말씀 속에는,
심판과 저주의 감정만이 아니라 슬픔과 애통의 감정이 함께 담겨 있다 생각하며 말씀을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다양한 감정을 가지고 지적하고 있는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죄는 무엇입니까?
첫째는 ‘외식’ 입니다.
특히 예수님께서는 7번의 지적 중 16절 한 번을 제외하고는
6번 모든 말씀에서 이 ‘외식한다’ 는 표현을 사용하고 계십니다.
외식하는 자의 또 하나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잘못된 생각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어리석음’ 까지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러한 이들의 모습을 두고 ‘소경’ 이라고까지 말씀하십니다.
두 번째로, 주님은 이들의 ‘탐심’ 을 지적하십니다.
그 탐심으로 인해 삐뚤어진 생각과 행동들을 지적하십니다.
앞서서는 어리석음이 이들의 행동을 잘못되게 인도했다면, 이번에는 탐심이 이들을 어리석음의 길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들의 모습 속에서, 가장 거룩한 척하지만 가장 세속적인 모습을 지적하고 계십니다.
세 번째로, ‘교만’ 을 지적하십니다.
우리는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죄의 습성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기에 죄인인 것입니다.
왜 주님이 이들을 바라보며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라고 혹독하게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아무리 어린 뱀이라 해도 근본적으로 그 안에 독을 품고 있는 것처럼, 태생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근본적인 죄가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있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은 인간의 외식함과 탐욕과 교만을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결론이 무엇입니까?
34절에서, 선지자, 지혜자, 서기관들을 죽이고 십자가에 못 박은 죄, 그들을 박해한 죄
35절에서는, 이 땅에서 흘린, 의로운 자의 피에 대한 죄를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앞서 말한 바리새인들의 외식과 탐욕과 교만의 죄가, 뒤에서 말하는 죄의 결과와 어떻게 연결된다는 말씀입니까?
오늘 우리도 이들과 같은 어리석음으로 외식함과 탐욕과 교만 안에 거한다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이와 같이 의로운 사람들을 죽이는 자의 자리에 앉을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말씀을 보며, 오늘 우리 한국 교회를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외식, 우리 안에 있는 탐욕, 우리 안에 있는 거짓이 우리를 회칠한 무덤처럼 만들어 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다른 사람까지 천국에 들어가는 문을 막고 있지는 않습니까?
복음을 전한다고 하면서, 복음의 본질이 아니라 진리가 아닌 것에 힘과 시간을 낭비하며 가르치고 있지는 않습니까?
주님의 일을 하면서 철저하게 손익을 따져가며 일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종교적 행동은 중요시 여기면서, 주님이 23절에 말씀하신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헌신짝처럼 내버리고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우리를 주님이 보신다면 ‘외식하는 자들아’ 라고 말씀하지는 않으시겠습니까?
늘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주님의 일을 감당하는 우리 되기 원합니다.
주님이 지금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향한 경고의 말씀이, 우리 한국 교회와 우리를 향한 말씀이라는 것을 깨닫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은 주님이 십자가 달리시기 며칠 전에 전해 주신 말씀입니다.
주님이 마지막 순간까지 간절히 우리에게 전하시고자 하셨던 메시지는 바로 정직한 믿음입니다.
그 마음을 가지고 오늘 우리의 믿음을 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그 주님의 마음을 알면, 우리 입술에서 주님 제가 바리새인입니다.
라는 고백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회개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시간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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