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가족 개념 마태복음 12:46-50 2005.2.13
미국 윌로우 교회 어느 교인의 간증입니다. "어느날 음식점에서 만나 알게 된 어떤 사람이 자기 부부와 함께 교회에 가자고 우리를 초청했습니다. 이 교회는 다른 교회와 좀 다른데 우리가 좋아할 것이라고 그는 말했습니다. 우리는 정말 그랬습니다. 아이들은 교회의 프로그램을 좋아했고, 우리는 매 주일 교회에 갔으며, 저는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였습니다. 그런데 일 년 반 전에, 갑자기 남편이 저를 버리고 직장에서 알게 된 어떤 여자하고 도망을 갔습니다. 남편은 차를 가져가 버렸고 아파트 집세는 두 달치나 밀려 있었습니다. 전화는 이미 끊어졌고, 돈은 한 푼도 없었고, 이제 음식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저는 두 아이를 데리고 혼자였습니다.
저는 심한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저는 누구에게 전화를 할 수도 없었고, 어디로 갈데도 없었습니다. 저는 생활 보호를 받아 본 적도 없었습니다. 저는 심지어 누구에게 이런 형편을 말해야 하는지도 몰랐습니다. 우리 이웃들은 매일 일하러 나갔고, 우리 셋은 그냥 텅빈 집에서 앉아서 울었습니다. 곧 우리는 더 이상 먹을 것이 없어서 배가 고프게 되었고 아이들은 먹을 것을 달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너무나 슬퍼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편물들은 모두가 청구서였습니다. 저는 우리 셋이 한꺼번에 죽기만을 소망하였습니다.
어느날 저녁에 한 가지 생각이 제게 떠올랐습니다. 저는 우리가 사는 건물이 조용해 지기를 기다렸다가 한밤중에 쓰레기통 있는 곳으로 나갔습니다. 저는 한 이웃집의 쓰레기를 다른 쓰레기 통으로 옮기고 먹을 만한 것이 남아 있는지 찾아보았습니다. 저는 정말 죽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어느 날 저녁 우리 집의 벨이 울렸습니다. 문을 열고 보니 주님의 천사가 그 곳에 서 있었습니다. 그녀는 안으로 들어와서 내가 처한 어려움을 보고 돌아갔습니다.
그날 저녁에 몇 사람들이 우리 집에 왔는데 따끈따끈하고 맛있는 음식을 가지고 왔습니다. 어떤 남자와 그의 아들은 식료품이 들어 있는 봉지들과 아이들의 옷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들은 이 모든 음식들이 교회의 음식 저장실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 다른 두 사람은 20불짜리 지폐 묶음을 가지고 와서 그 돈은 우리의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보면서 제 눈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이 때까지 제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음날 밀린 집세가 지불되었고 전화는 다시 연결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제가 일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저는 일자리를 구하게 되었고 이제는 저희 스스로 생활을 꾸려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저희는 잘 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윌로우 교회 목사님 그리고 성도님 이 교회가 저의 생명을 구했습니다.
참으로 멋진 교회입니다. 음식저장실이 있는 교회, 지폐 묶음이 있어 필요한 사람에게 나눠줄 수 있는 교회, 저희 교회가 그런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살기를 원하실까요? 윌로우교회를 개척하신 길버트 빌지키언 목사님의 대답은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소망은 공동체입니다. 시편133편의 공동체를 실현하는 예수공동체이다.”
시편 133 편 1절을 보면 형제자매가 어울려서 함께 사는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다고 감탄을 하고 있습니다. 또 3절을 보면 그렇게 아름답게 어울려 살아갈 때에 주님께서 그곳에 복을 주신다고 약속을 하셨는데 그 복은 곧 영생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름답게 어울려 사는 공동체를 소망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 안에서만 인생을 살아가는 의미를 발견하고 기쁜 삶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제 여동생과 전화통화를 했습니다. 어머님 건강이 안 좋아지신 얘기, 둘째 누님이 살아가는 모습들에 대해 얘기를 나누고 전화를 끊었는데 밀려오는 애틋함이 견디기가 어려웠습니다. 가족이 참 소중한 것인데도 옆에 같이 있어주지 못하는 자신이 죄송스러웠습니다.
가족은 서로 사랑하며 섬겨줍니다. 우리는 가족들로부터 많은 기쁨을 얻습니다. 주님은 바로 이런 가족처럼 사는 공동체를 기뻐하십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러한 공동체를 만드는 기초가 무엇인지 우리에게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바로 가족개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새로운 가족의 개념을 갖고 살아갈 것을 가르치십니다.
본문배경을 보면 예수님의 가족이 총출동해서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일에 격려나 응원을 하러 온 것일까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마가복음을 보면 예수님이 귀신들려 눈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고치셨을 때 사람들이 “이 사람이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그리스도다”라는 반응을 보이자 바리새파 사람들이 이를 시기하여 그가 귀신, 즉 바알세불의 힘을 빌려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라고 비난을 했습니다. 예수님의 가족들은 그 소문만을 듣고 불행히도 그것을 믿고 예수님을 붙잡으로 온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48절을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왔다고 하자 예수님께서는 “누가 나의 어머니이며, 형제들이냐?”하고 반문하셨습니다. 그리고 주의 제자들 가리키며 “보아라! 나의 어머니와 나의 형제들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누가 예수님의 가족이라는 것입니까? 50절을 보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즉 아버지의 뜻을 따르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사는 사람이 예수님의 가족이라는 것입니다.
혹자는 예수님이 어머님도 몰라보는 불효자 같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머님을 극진히 사랑한 분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시는 그 순간에도 예수님은 어머님을 생각하시고 제자 요한에게 당신의 어머님을 부탁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 이렇게 오해할만한 말씀, 그 가족들이 들었으면 실망할 만한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가족 개념을 제자들에게 설명해주시기 위해서입니다.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가족은 혈연공동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느냐 살지 않느냐가 가족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인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이 가족이며 그 뜻을 거부하는 사람은 가족이 아닌 것입니다. 제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예수님을 쫒아 자신의 인생을 드린 사람들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가족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하나님의 가족이 될 수 있습니까?
요한복음 1장에서는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의 죄가 없어지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누구든지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마틴 루터는 이것을 이렇게 재미있게 표현합니다.
‘천국에 가면 입구에 간판이 하나 있을 것인데 거기에는 틀림없이 이렇게 써 있을 것이다. <오직 거듭난 자만이 입장 가능>. 무슨 의미입니까?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않고서는 결코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19세기의 위대한 설교가 조지 휫필드의 일화입니다.
이분이 가장 좋아하는 설교가 ‘당신은 거듭나야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설교를 통해 많은 사람이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한 청년이 이 말씀에 은혜를 받고 자원 봉사자가 되겠다고 목자님을 따라나서서 그를 비서처럼 도왔습니다. 그런데 이 목사님이 늘 같은 주제로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이 청년은 점점 지루해졌고 견디다 못해 목사님께 얘기했습니다. “목사님 설교주제는 그것뿐입니까? 거듭남에 대해 벌써 70번이나 들었습니다.”
이에 대한 목사님의 반응이 무엇이었습니까? 목사님이 그 청년의 어깨를 잡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네가 거듭나야 되기 때문이다.”였습니다.
70번이나 설교를 할 정도로 거듭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의미는 거듭난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청년은 70번의 설교를 듣고도 거듭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교회 생활은 하는데 거듭나지 못하고 예수님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그것만큼 안타까운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못하면 교회 생활을 해도 기쁨과 감동이 없습니다.
교회가 무엇입니까? 주님이 세우시고, 주님이 주인이 되셔서 다스리시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러나 연약한 인간들이 모여 있는 곳이 또한 교회입니다. 그래서 이런 저런 이야기로 늘 시끄럽습니다. 인간관계가 삐거덕거립니다. 세상의 속되고 추한 모습들이 교회 안에서도 발견이 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소중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그 가운데서 거듭남, 즉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지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부족하지만 하나님이 세우신 곳입니다. 사람을 보면 실망하고 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훌륭한 분인줄 알았는데...저 분이 저럴 수가!’ 라는 생각을 우리 머릿속에서 지워야합니다. 다른 사람이 사람들이 보기에 칭찬할 만한 삶을 살든지 그렇지 못하든지 그것은 그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다른 사람으로 인해 내 신앙이 흔들린다면 그것은 나의 신앙에 문제가 있다는 얘기입니다. 신앙 생활은 나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인 것입니다. .
우리가 시험에 들지 않는 방법은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늘 그대로이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교회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을 바라보면 기쁨 있고 감동이 있게 됩니다. 하나님을 바라볼 때 우리는 참으로 아름다운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또한 우리의 신앙이 성숙되어 지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배우는 곳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배우기 위해 우리의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또 읽을 때 우리는 기뻐하고 즐거워해야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겨야 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는 성경이 참으로 즐거운 책인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듣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결단하는 시간이 됩니다. 또한 우리는 교제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합니다. 신앙이 성숙한 사람들을 보면서 ‘아하! 저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구나!’깨닫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의 실패와 실수에 대하여 들으며 우리는 교훈을 얻게 됩니다. 또한 전도와 봉사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알게됩니다.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갈 때 우리는 한 영혼을 사랑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물론 봉사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지고 가셨던 주님의 고난을 알고 그 길이 바로 우리의 삶인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교회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배우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며 그 뜻을 우리의 삶 가운데 이루어 가는 가운데 우리가 변화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숙입니다. 주님을 닮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직분을 맡고 있는 것은 참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직분이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제가 목사라는 것을 하나님은 인정해 주지 않으십니다. 무엇을 인정하십니까? 제가 얼마나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갔느냐, 얼마나 하나님을 닮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으로 이전에 내가 이야기했던 모든 것을 해로 여긴다.”고 했습니다.
멕체인이라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재능보다 더 탁월한 재능은 없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또 교회가 어떤 곳입니까?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뜻이 이 교회를 지배해야 합니다. 세상의 가치관이 교회를 다스려서는 안 됩니다. 사람의 생각이 교회를 지배해서는 결코 하나님의 뜻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이제 십자가를 지고 죽어야 하는 시기가 왔다고 얘기했을 때 베드로의 반응이 무엇입니까? 절대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을 말렸습니다. 그가 말리는 것은 굉장히 타당한 것입니다. 저 같아도 말렸을 것입니다. 내가 존경하고 사랑하는 주님이 십자가에서 고통을 받고 죽는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인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런 베드로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어떤 사람입니까? 교회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도록 돕는 사람입니다. 함께 하나님의 일을 해나가도록 하는 것이 교회인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하나님은 나를 택하시고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일원으로 직분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도록 우리에게 직분을 주셨다는 것을 기억해야합니다. 내가 교사입니까? 교사로서 이루어야할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구역장입니까? 구역장으로써 이루어야 될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함께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가족입니다. 방관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거침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거침돌은 하나님의 가족일 수 없습니다. 가족은 서로 돕는 존재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충성하며 그 뜻을 따라 살아가도록 저들을 위하여 내가 무엇을 할까? 하는 고민이 늘 우리 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바라보며 다른 사람이 더 온전히 설 수 있도록 우리는 노력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평생을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는 편히 있을 수 있었습니다. 교회 지도자로서 교회 안에 있었으면 그는 대접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험한 여행길을 가며 자신의 삶을 드렸던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서 헌신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말리기 위해서 출동한 가족들에게 굉장히 모진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가로막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참으로 우리는 어떻게 교회 생활을 해야 할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합니다. 우리는 가족입니까? 먼저 나는 하나님의 가족입니까? 우리는 거듭났는지를 생각해봐야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하여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또한 우리 주위에 있는 하나님의 가족들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살아가도록 우리의 삶을 드려야 합니다.
에베소서 2장 19절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여러분은 외국 사람이나 나그네가 아니요, 성도들과 함께 시민이며 나그네가 아닙니다.” 에베소 교회는 이방인들이 모인 곳입니다. 그들은 나그네였습니다. 그러나 믿음안에서 서로가 외국 사람이 아닙니다. 성도들과 함께 시민이며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가족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옆의 사람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신앙생활은 달라집니다. 나와는 관계없는 사람, 보기 싫고, 안보면 되는 사람이라는 생각으로 살아간다면 우리는 결코 가족이라고 할 수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직도 안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우리는 해봐야합니다.
가족은 서로 사랑하는 관계입니다. 동시에 가족은 내가 사랑하고 보살펴야 하는 대상입니다. 가족이 허물이 있다면 감당해야하고 잘못이 있다면 덮어줘야 합니다.
우리가 왜 다른 사람을 미워합니까? 그것은 그 사람을 가족으로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 자꾸 비난합니까? 가족이란 인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가족으로 볼 때 우리의 삶은 놀랍게 변할 것입니다.
어느 날 랍비가 제자들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새벽이 언제 오느냐?” 한 제자가 대답합니다. “먼동이 틀 때입니다.” “아니다.”하고 랍비가 고개를 젓습니다. 다른 제자가 대답합니다. “새가 울 때입니다.” “그것도 아니야” 그러자 다른 제자가 랍비에게 “그럼 새벽은 언제 오는 것입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이에 랍비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저기 길거리에 지나가는 낯선 사람이 너의 형제자매로 보일 때, 그때 새벽은 오는 것이다.” 이 새벽은 시간적, 물리적인 새벽을 의미하지 않고, 정신적인 것이고, 영적인 것입니다. 진리를 향한 깨달음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새벽을 경험하셨습니까?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사는 사람들이 그저 남이 아니고 나의 가족처럼 느껴지고, 그래서 그 사람이 필요한 것이 무엇이고 그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더 잘하도록 하기 위해서 내가 도와줘야 될 일이 무엇일까 하는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본다면 그것이 주의 자녀들의 새벽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새벽을 위해서 기도하시고 이 새벽을 소망하시기 바랍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어 갈 것입니다. 우리 섬기는 교회가 하나님의 아름다운 공동체로서 존재하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누가 나의 형제요 가족인가에 대한 우리 스스로의 답변과 깨달음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섬기는 교회와 여러분들이 한 가족으로 아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미국 윌로우 교회 어느 교인의 간증입니다. "어느날 음식점에서 만나 알게 된 어떤 사람이 자기 부부와 함께 교회에 가자고 우리를 초청했습니다. 이 교회는 다른 교회와 좀 다른데 우리가 좋아할 것이라고 그는 말했습니다. 우리는 정말 그랬습니다. 아이들은 교회의 프로그램을 좋아했고, 우리는 매 주일 교회에 갔으며, 저는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였습니다. 그런데 일 년 반 전에, 갑자기 남편이 저를 버리고 직장에서 알게 된 어떤 여자하고 도망을 갔습니다. 남편은 차를 가져가 버렸고 아파트 집세는 두 달치나 밀려 있었습니다. 전화는 이미 끊어졌고, 돈은 한 푼도 없었고, 이제 음식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저는 두 아이를 데리고 혼자였습니다.
저는 심한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저는 누구에게 전화를 할 수도 없었고, 어디로 갈데도 없었습니다. 저는 생활 보호를 받아 본 적도 없었습니다. 저는 심지어 누구에게 이런 형편을 말해야 하는지도 몰랐습니다. 우리 이웃들은 매일 일하러 나갔고, 우리 셋은 그냥 텅빈 집에서 앉아서 울었습니다. 곧 우리는 더 이상 먹을 것이 없어서 배가 고프게 되었고 아이들은 먹을 것을 달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너무나 슬퍼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편물들은 모두가 청구서였습니다. 저는 우리 셋이 한꺼번에 죽기만을 소망하였습니다.
어느날 저녁에 한 가지 생각이 제게 떠올랐습니다. 저는 우리가 사는 건물이 조용해 지기를 기다렸다가 한밤중에 쓰레기통 있는 곳으로 나갔습니다. 저는 한 이웃집의 쓰레기를 다른 쓰레기 통으로 옮기고 먹을 만한 것이 남아 있는지 찾아보았습니다. 저는 정말 죽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어느 날 저녁 우리 집의 벨이 울렸습니다. 문을 열고 보니 주님의 천사가 그 곳에 서 있었습니다. 그녀는 안으로 들어와서 내가 처한 어려움을 보고 돌아갔습니다.
그날 저녁에 몇 사람들이 우리 집에 왔는데 따끈따끈하고 맛있는 음식을 가지고 왔습니다. 어떤 남자와 그의 아들은 식료품이 들어 있는 봉지들과 아이들의 옷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들은 이 모든 음식들이 교회의 음식 저장실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 다른 두 사람은 20불짜리 지폐 묶음을 가지고 와서 그 돈은 우리의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보면서 제 눈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이 때까지 제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음날 밀린 집세가 지불되었고 전화는 다시 연결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제가 일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저는 일자리를 구하게 되었고 이제는 저희 스스로 생활을 꾸려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저희는 잘 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윌로우 교회 목사님 그리고 성도님 이 교회가 저의 생명을 구했습니다.
참으로 멋진 교회입니다. 음식저장실이 있는 교회, 지폐 묶음이 있어 필요한 사람에게 나눠줄 수 있는 교회, 저희 교회가 그런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살기를 원하실까요? 윌로우교회를 개척하신 길버트 빌지키언 목사님의 대답은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소망은 공동체입니다. 시편133편의 공동체를 실현하는 예수공동체이다.”
시편 133 편 1절을 보면 형제자매가 어울려서 함께 사는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다고 감탄을 하고 있습니다. 또 3절을 보면 그렇게 아름답게 어울려 살아갈 때에 주님께서 그곳에 복을 주신다고 약속을 하셨는데 그 복은 곧 영생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름답게 어울려 사는 공동체를 소망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 안에서만 인생을 살아가는 의미를 발견하고 기쁜 삶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제 여동생과 전화통화를 했습니다. 어머님 건강이 안 좋아지신 얘기, 둘째 누님이 살아가는 모습들에 대해 얘기를 나누고 전화를 끊었는데 밀려오는 애틋함이 견디기가 어려웠습니다. 가족이 참 소중한 것인데도 옆에 같이 있어주지 못하는 자신이 죄송스러웠습니다.
가족은 서로 사랑하며 섬겨줍니다. 우리는 가족들로부터 많은 기쁨을 얻습니다. 주님은 바로 이런 가족처럼 사는 공동체를 기뻐하십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러한 공동체를 만드는 기초가 무엇인지 우리에게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바로 가족개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새로운 가족의 개념을 갖고 살아갈 것을 가르치십니다.
본문배경을 보면 예수님의 가족이 총출동해서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일에 격려나 응원을 하러 온 것일까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마가복음을 보면 예수님이 귀신들려 눈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고치셨을 때 사람들이 “이 사람이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그리스도다”라는 반응을 보이자 바리새파 사람들이 이를 시기하여 그가 귀신, 즉 바알세불의 힘을 빌려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라고 비난을 했습니다. 예수님의 가족들은 그 소문만을 듣고 불행히도 그것을 믿고 예수님을 붙잡으로 온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48절을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왔다고 하자 예수님께서는 “누가 나의 어머니이며, 형제들이냐?”하고 반문하셨습니다. 그리고 주의 제자들 가리키며 “보아라! 나의 어머니와 나의 형제들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누가 예수님의 가족이라는 것입니까? 50절을 보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즉 아버지의 뜻을 따르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사는 사람이 예수님의 가족이라는 것입니다.
혹자는 예수님이 어머님도 몰라보는 불효자 같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머님을 극진히 사랑한 분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시는 그 순간에도 예수님은 어머님을 생각하시고 제자 요한에게 당신의 어머님을 부탁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 이렇게 오해할만한 말씀, 그 가족들이 들었으면 실망할 만한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가족 개념을 제자들에게 설명해주시기 위해서입니다.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가족은 혈연공동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느냐 살지 않느냐가 가족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인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이 가족이며 그 뜻을 거부하는 사람은 가족이 아닌 것입니다. 제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예수님을 쫒아 자신의 인생을 드린 사람들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가족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하나님의 가족이 될 수 있습니까?
요한복음 1장에서는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의 죄가 없어지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누구든지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마틴 루터는 이것을 이렇게 재미있게 표현합니다.
‘천국에 가면 입구에 간판이 하나 있을 것인데 거기에는 틀림없이 이렇게 써 있을 것이다. <오직 거듭난 자만이 입장 가능>. 무슨 의미입니까?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않고서는 결코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19세기의 위대한 설교가 조지 휫필드의 일화입니다.
이분이 가장 좋아하는 설교가 ‘당신은 거듭나야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설교를 통해 많은 사람이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한 청년이 이 말씀에 은혜를 받고 자원 봉사자가 되겠다고 목자님을 따라나서서 그를 비서처럼 도왔습니다. 그런데 이 목사님이 늘 같은 주제로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이 청년은 점점 지루해졌고 견디다 못해 목사님께 얘기했습니다. “목사님 설교주제는 그것뿐입니까? 거듭남에 대해 벌써 70번이나 들었습니다.”
이에 대한 목사님의 반응이 무엇이었습니까? 목사님이 그 청년의 어깨를 잡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네가 거듭나야 되기 때문이다.”였습니다.
70번이나 설교를 할 정도로 거듭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의미는 거듭난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청년은 70번의 설교를 듣고도 거듭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교회 생활은 하는데 거듭나지 못하고 예수님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그것만큼 안타까운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못하면 교회 생활을 해도 기쁨과 감동이 없습니다.
교회가 무엇입니까? 주님이 세우시고, 주님이 주인이 되셔서 다스리시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러나 연약한 인간들이 모여 있는 곳이 또한 교회입니다. 그래서 이런 저런 이야기로 늘 시끄럽습니다. 인간관계가 삐거덕거립니다. 세상의 속되고 추한 모습들이 교회 안에서도 발견이 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소중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그 가운데서 거듭남, 즉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지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부족하지만 하나님이 세우신 곳입니다. 사람을 보면 실망하고 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훌륭한 분인줄 알았는데...저 분이 저럴 수가!’ 라는 생각을 우리 머릿속에서 지워야합니다. 다른 사람이 사람들이 보기에 칭찬할 만한 삶을 살든지 그렇지 못하든지 그것은 그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다른 사람으로 인해 내 신앙이 흔들린다면 그것은 나의 신앙에 문제가 있다는 얘기입니다. 신앙 생활은 나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인 것입니다. .
우리가 시험에 들지 않는 방법은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늘 그대로이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교회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을 바라보면 기쁨 있고 감동이 있게 됩니다. 하나님을 바라볼 때 우리는 참으로 아름다운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또한 우리의 신앙이 성숙되어 지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배우는 곳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배우기 위해 우리의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또 읽을 때 우리는 기뻐하고 즐거워해야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겨야 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는 성경이 참으로 즐거운 책인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듣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결단하는 시간이 됩니다. 또한 우리는 교제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합니다. 신앙이 성숙한 사람들을 보면서 ‘아하! 저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구나!’깨닫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의 실패와 실수에 대하여 들으며 우리는 교훈을 얻게 됩니다. 또한 전도와 봉사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알게됩니다.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갈 때 우리는 한 영혼을 사랑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물론 봉사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지고 가셨던 주님의 고난을 알고 그 길이 바로 우리의 삶인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교회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배우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며 그 뜻을 우리의 삶 가운데 이루어 가는 가운데 우리가 변화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숙입니다. 주님을 닮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직분을 맡고 있는 것은 참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직분이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제가 목사라는 것을 하나님은 인정해 주지 않으십니다. 무엇을 인정하십니까? 제가 얼마나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갔느냐, 얼마나 하나님을 닮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으로 이전에 내가 이야기했던 모든 것을 해로 여긴다.”고 했습니다.
멕체인이라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재능보다 더 탁월한 재능은 없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또 교회가 어떤 곳입니까?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뜻이 이 교회를 지배해야 합니다. 세상의 가치관이 교회를 다스려서는 안 됩니다. 사람의 생각이 교회를 지배해서는 결코 하나님의 뜻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이제 십자가를 지고 죽어야 하는 시기가 왔다고 얘기했을 때 베드로의 반응이 무엇입니까? 절대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을 말렸습니다. 그가 말리는 것은 굉장히 타당한 것입니다. 저 같아도 말렸을 것입니다. 내가 존경하고 사랑하는 주님이 십자가에서 고통을 받고 죽는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인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런 베드로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어떤 사람입니까? 교회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도록 돕는 사람입니다. 함께 하나님의 일을 해나가도록 하는 것이 교회인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하나님은 나를 택하시고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일원으로 직분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도록 우리에게 직분을 주셨다는 것을 기억해야합니다. 내가 교사입니까? 교사로서 이루어야할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구역장입니까? 구역장으로써 이루어야 될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함께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가족입니다. 방관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거침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거침돌은 하나님의 가족일 수 없습니다. 가족은 서로 돕는 존재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충성하며 그 뜻을 따라 살아가도록 저들을 위하여 내가 무엇을 할까? 하는 고민이 늘 우리 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바라보며 다른 사람이 더 온전히 설 수 있도록 우리는 노력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평생을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는 편히 있을 수 있었습니다. 교회 지도자로서 교회 안에 있었으면 그는 대접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험한 여행길을 가며 자신의 삶을 드렸던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서 헌신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말리기 위해서 출동한 가족들에게 굉장히 모진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가로막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참으로 우리는 어떻게 교회 생활을 해야 할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합니다. 우리는 가족입니까? 먼저 나는 하나님의 가족입니까? 우리는 거듭났는지를 생각해봐야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하여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또한 우리 주위에 있는 하나님의 가족들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살아가도록 우리의 삶을 드려야 합니다.
에베소서 2장 19절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여러분은 외국 사람이나 나그네가 아니요, 성도들과 함께 시민이며 나그네가 아닙니다.” 에베소 교회는 이방인들이 모인 곳입니다. 그들은 나그네였습니다. 그러나 믿음안에서 서로가 외국 사람이 아닙니다. 성도들과 함께 시민이며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가족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옆의 사람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신앙생활은 달라집니다. 나와는 관계없는 사람, 보기 싫고, 안보면 되는 사람이라는 생각으로 살아간다면 우리는 결코 가족이라고 할 수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직도 안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우리는 해봐야합니다.
가족은 서로 사랑하는 관계입니다. 동시에 가족은 내가 사랑하고 보살펴야 하는 대상입니다. 가족이 허물이 있다면 감당해야하고 잘못이 있다면 덮어줘야 합니다.
우리가 왜 다른 사람을 미워합니까? 그것은 그 사람을 가족으로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 자꾸 비난합니까? 가족이란 인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가족으로 볼 때 우리의 삶은 놀랍게 변할 것입니다.
어느 날 랍비가 제자들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새벽이 언제 오느냐?” 한 제자가 대답합니다. “먼동이 틀 때입니다.” “아니다.”하고 랍비가 고개를 젓습니다. 다른 제자가 대답합니다. “새가 울 때입니다.” “그것도 아니야” 그러자 다른 제자가 랍비에게 “그럼 새벽은 언제 오는 것입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이에 랍비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저기 길거리에 지나가는 낯선 사람이 너의 형제자매로 보일 때, 그때 새벽은 오는 것이다.” 이 새벽은 시간적, 물리적인 새벽을 의미하지 않고, 정신적인 것이고, 영적인 것입니다. 진리를 향한 깨달음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새벽을 경험하셨습니까?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사는 사람들이 그저 남이 아니고 나의 가족처럼 느껴지고, 그래서 그 사람이 필요한 것이 무엇이고 그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더 잘하도록 하기 위해서 내가 도와줘야 될 일이 무엇일까 하는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본다면 그것이 주의 자녀들의 새벽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새벽을 위해서 기도하시고 이 새벽을 소망하시기 바랍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어 갈 것입니다. 우리 섬기는 교회가 하나님의 아름다운 공동체로서 존재하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누가 나의 형제요 가족인가에 대한 우리 스스로의 답변과 깨달음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섬기는 교회와 여러분들이 한 가족으로 아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댓글 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