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요한복음 9:1–11
제목: 눈먼 자를 치유하심
우리의 눈은 믿을만한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눈은 너무 쉽게 속습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고, 우리 눈에 보인다고 해서 존재한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의 눈은 완전하지 않고 한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잘 안다고 자부할 수 있겠습니까?
인간은 영적인 부분에서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계시의 말씀이 아니고서는, 결코 하나님에 대해서 알 방법이 없는 존재입니다.
제대로 보려면 영적인 눈이 열려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날 때부터 맹인 된 자를 고치시는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1절에 보면,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 지라”
맹인이 먼저 주님을 본 것이 아니라 주님이 먼저 맹인을 보셨습니다.
주님은 우연히 불쌍한 맹인을 발견하신 것이 아니라, 이미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계셨으며, 그래서 주님은 그를 찾아가신 것입니다. 그런데 맹인은 주님이 오신지도 몰랐을 뿐만 아니라, 주님의 이름을 부르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주님이 누구인지도 몰랐고, 주님이 어떤 능력을 가진 분이신지도 몰랐습니다. 따라서 그는 주님께 눈을 뜨게 해 달라는 부탁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게 바로 구원받기 전의 우리의 상태인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맹인을 찾아가셨을 때, 주님과 함께 있던 제자들이 주님께 묻습니다.
2절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당시 유대인들은 모든 고난과 불행과 질병을 죄의 결과로 이해를 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단호하게 대답하십니다.
3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이 구절을 잘못 해석하게 되면, 하나님은 당신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시기 위해 사람들을 장애자로 만들어 버리시는 아주 끔찍한 분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을 헬라어 원어대로 해석하면 “아니다, 그렇지 않다!” 예수님이 대답하셨다. “하지만 그의 보지 못함으로 인해 너희는 하나님이 그를 위해 일으키시는 기적을 볼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대답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일을 드러내시기 위해 그를 맹인으로 태어나게 한 것이 아니라, 그가 맹인으로 태어난 결과를 사용하여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보이실 것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란 무엇입니까?
사 9:2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 즉, 그것은 흑암과 사망에 처한 당신의 백성들을 건져내어 빛으로 인도해 내시는 일을 말합니다.
그것을 주님께서 4절에서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4절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이 구절도 번역하면,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해야 한다’ 라는 뜻입니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이 무엇입니까?
요 6:38-39절에 보면,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바로 이것, 아버지가 살려내라고 한 이들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다 살려내시는 일, 바로 이 일을 맹인 된 사람을 통해 보여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일을 위해 이 땅에 보내심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방법으로 하십니까? 바로 십자가입니다.
본문에서는 주님께서 맹인을 고치시는 방법이 십자가 사역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6절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주님은 왜 이렇게 지저분한 방식으로 치료하시는 것입니까? 주님은 말씀만으로도 병자를 고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왜 유독 흙에 침을 개어 눈에 발라 주신 것입니까?
성경에 예수님께서 침을 뱉어 고치신 사건은 딱 3번 나옵니다.
막 7장에서 귀먹은 자를 고치실 때, 막 8장에 벳새다 맹인에게 눈에 직접 침을 뱉으시고 안수를 두 번 하여 고치실 때, 그리고 오늘 본문입니다.
주님께서 침을 뱉어 흙에 섞으신 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태초에 인간을 흙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범죄한 이후에 땅은 저주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범죄한 인간에게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흙은 저주받은 인간의 현실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자신의 침과 흙을 섞으십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죄로 인해 더러워진 흙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예수님의 거룩한 의가 흙으로 전가되고, 흙에 담긴 죄와 저주가 예수님께로 전가되는 것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기를 통해서 이루실 구원사역이 이 행위 안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7절에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으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역사로 죄가 씻어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실로암은 보냄 받은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예수님만이 우리의 악함과 더러움을 씻어주시고 눈을 뜨게 하셔서 빛을 보게 하시는 분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보냄 받으신 예수님이 십자가를 통해 이루시는 일을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끝나면 안 됩니다. 실로암의 의미는 이중적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의미도 있지만, 본문에서는 맹인도 예수님께 보냄을 받아 실로암에 갔습니다. 맹인은 눈을 씻은 후에 밝은 눈으로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 때문에 눈을 뜨게 된 것을 증거하게 되는 것이 11절 말씀입니다. “대답하되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
예수님으로 인해 눈을 뜨게 된 그는 거짓말쟁이로 몰리는 상황에서도. 또, 유대교에서 출교를 당하는 위기 속에서도 예수님께서 자기 눈을 뜨게 하셨으며, 그분이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라는 사실을 중단하지 않고 증거 합니다.
“나의 눈을 뜨게 하신 분은 예수님입니다. 나를 새롭게 하신 분은 예수님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성도가 해야 할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하여 모든 죄를 씻김 받은 우리는 이제 예수님에 의해서 세상으로 보내심을 받은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왜입니까?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받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맹인이 주님을 먼저 본 것이 아니라, 주님이 먼저 그를 보셨고, 맹인이 주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주님이 맹인을 찾아오신 것처럼, 주님은 우리가 주님을 찾기도 전에, 믿기도 전에, 우리를 찾아오셨고, 우리의 죄를 씻어주셨고, 우리의 눈을 열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십자가의 사랑을 받은 자입니다.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십자가에 담긴 주님의 사랑을 깨닫는 성도 되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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