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마태복음 12 : 1 – 13
제목: 온전한 신앙
안식일에 주님과 함께 밀밭을 지나가던 제자들이 시장함으로
이삭을 잘라 먹게 되는데, 이 모습을 본 바리새인들은
이 일을 두고 안식일을 범했다고 예수님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보며 생각하게 되는 하나의 주제가 있습니다.
‘편협함’ 입니다.
편협한 사람들에게는 공통의 특징이 있습니다.
자신이 아는 것만을 정답으로 생각하고
자신의 관점이나 경험을 넘어서지 못합니다.
생각이 고정되어 패턴을 따라 살아가는 데 익숙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형식주의에 빠지기가 쉽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생각이나 기준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적용하거나 강요하는 특징도 가지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바로 이러한 ‘편협함’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들은 이런 고정관념을 가지게 되었습니까?
바리새인의 역사를 살펴보면, 성전 파괴와 바벨론 포로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성전이 파괴되고, 포로로 먼 이국땅에 끌려가게 된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큰 ‘딜레마’ 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이들의 신앙은 성전 중심의 신앙이었습니다.
자신들의 정체성을 성전 예배에서 찾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성전은 완전히 무너졌고,
자신들은 먼 이국땅에 포로로 끌려와 있습니다.
이때 이스라엘 민족 안에서는 엄청난 신앙적 관점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성전 중심의 신앙에서 율법, 말씀 중심의 신앙으로 그들의 신앙이 변화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렇게 율법을 붙잡고, 다시 하나님이 주신 땅으로 돌아가기를 갈망하며 경건함 삶을 살고자 했던 당시의 이들의 신앙을 ‘ 유다이즘 ’ 이라고 불렀고, 이때로부터 회당 문화가 시작되어 지금까지 이들의 삶의 중심이 되어오고 있습니다.
그렇게 다시 포로에서 복귀하고도 이러한 사고는 계속 이어져 오다가, 예수님 오시기 167년 전 ‘마카베오 항쟁’ 이라는 싸움이 일어납니다.
로마가 이스라엘을 헬레니즘화하고자 하는 정책을 펼침으로 인해
이에 반대하여 일어난 항쟁이었습니다.
이때 ‘하시딤’이라는 이름으로 이 싸움에 참여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시딤은 ‘자비’ 라는 뜻의 이름으로, 경건과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로 인정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하시딤이라 불리던 사람들로부터 바리새파 사람들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이들과 대조가 되는 사두개인들이 대제사장 출신의 혈통 중심의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는 반면, 바리새인은 다양한 계층 출신들이 바리새인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철저한 율법 준수가 이들의 정체성이 되어 주었습니다.
시작은 말씀을 붙들고 온전한 경건 생활을 하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며 그 본 의도는 퇴색되고 오직 율법 준수라는 기준이 율법주의, 형식주의라는 또 다른 틀이 되어 편협한 사고 안에 그들을 가두어 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주님은 너희가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는 율법과 성전보다 더 큰 것이 예수님 자신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주님은 그런 예수님 자신과 함께 하나님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너희가 생각하는 성전보다 크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위해서라고 하면서 하나님을 모르고 있는 바리새인들을 지적하십니다.
그런 이들에게 주님은 호세아서의 말씀을 인용하여(호세아 6:6)
본문 7절에서,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한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호세아서 6장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1절에서는,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 이라고 말씀합니다.
3절에서는,
“그러므로 우리가 여화와를 알자 힘써 알자” 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6절에서는,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라고 말씀합니다.
호세아의 사명이 무엇이었습니까?
호세아는 음란한 여인 고멜을 아내로 맞이하여
끝까지 사랑하는 사명을 가지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용서하며 품어 주는 사명을 가졌던 사람입니다.
그런 호세아를 통해 하나님이 이와 같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지금 배고픔으로 인해 이삭을 잘라 먹는 이들의 행동조차 용납하지 못하는 편협함을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고수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이 편협함에 빠질 때, 어떤 모습을 갖게 되는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주님은 이 말씀 이후에 회당에 들어가 안식일임에도 그 회당에 있던 한쪽 손 마른 사람을 고쳐 주십니다.
이때에도 이런 주님의 행동을 고발하려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이들에게 주님은
‘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다고 말씀하십니다.’(12절)
주님은 말로만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무엇이 옳은 것인지를 보여 주십니다.
그런데, 이 고쳐주심의 마지막 장면에서 성경은 뭐라 말합니까?
13절에서, “이에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성하더라” 라고 기록합니다.
그의 좌우가 불균형이었던 모습에서 주님이 치료해 주심을 통해 균형 잡힌 모습으로 회복된 것입니다.
바리새인의 모습이 바로 이 한쪽 손 마른 사람들의 모습과 같은 것입니다.
무언가 열심히 하기는 하는데, 온전하지 못합니다.
심하게 뒤틀려 버렸는데, 정작 자신들은 그 모습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마지막 표현을 통해, 우리의 신앙도 이와 같은 모습으로 회복되기를 소망합니다.
균형을 잃어버린 신앙들이 있습니다.
교회에서의 삶과 평상시의 삶의 균형이 깨어진 모습들이 있습니다.
보여지는 모습과 감추어진 모습이 다른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하는 말과 살아가는 삶의 모습이 다른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모습이 바로, 지금 회당에 들어와 있지만
한쪽 손 마른 사람과 같은 모습 아니겠습니까?
건강한 영성이란,
사람의 모든 부분에서 건강하고 균형 잡힌 모습을 말합니다.
율법을 지키는 일은 그 어떤 일보다 더욱 중요하게 여기면서도 인애와 자비를 잃어버린 신앙이 있다면, 그 신앙은 올바른 신앙이 아님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예배는 열심히 드리는데, 삶 가운데 용서를 잃어버리고 다툼과 시기 편 가름을 계속하고 있다면, 그 모습도 하나님 앞에 올바르지 못한 모습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 이 아침을 시작하며 함께 기도하기 원합니다.
하나님, 우리의 신앙이 바른 신앙 가운데 거하게 하옵소서.
한쪽 손 마른 사람처럼 뒤틀려버린 내 삶의 모습은 없습니까?
고쳐 주옵소서. 기도하는 아침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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