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애1:1-11
제목:죄의 심각성
▶첫째, 죄의 심각성은 나중을 생각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슬프다 이 성이여 전에는 사람들이 많더니 이제는 어찌 그리 적막하게 앉았는고 전에는 열국 중에 크던 자가 이제는 과부 같이 되었고 전에는 열방 중에 공주였던 자가 이제는 강제 노동을 하는 자가 되었도다”(1절) 반복되는 단어가 있는데, “전에는”과 “이제는”이다. 과거에는 그렇게 대단했던 부귀영화를 자랑했던 나라가 왜 이렇게 되었는가? 바벨론 때문인가? 아니다. 죄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죄를 멀리하지 않으면 망한다는 선지자들의 말을 들으면서도, “설마”하며 죄의 결과를 전혀 생각하지 않고 죄 짓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왜인가? 죄는 나중을 생각하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의 더러운 것이 그의 옷깃에 묻어 있으나 그의 나중을 생각하지 아니함이여”(9절) 더러운 것이 옷에 묻었는데도 나중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죄짓는 사람들은 나중 생각을 하지 않는다. 내가 이렇게 죄를 지으면 나중에 어떻게 될까? 이런 생각이 없다. 뒤를 생각하지 않는다. 죄를 뿌리고도 죄의 열매가 맺히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죄의 무서움이다. 9절의 “나중”은 성경에서 <종말>을 의미한다. 성도는 종말을 생각하며, 종말을 준비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왜인가? 모든 것에는 끝이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모든 고난에도 끝이 있다. 성도는 항상 끝이 있음을 기억하고, 끝을 염두에 두고, 오늘 죄를 멀리하는 사람이 되어야한다. 나중의 결말을 생각하고, 오늘을 믿음으로 사는 성도가 되라.
▶둘째, 죄의 심각성은 인생을 형통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의 대적들이 머리가 되고 그의 원수들이 형통함은 그의 죄가 많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곤고하게 하셨음이라”(5절) “원수의 형통함”은 이스라엘의 죄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죄를 많이 짓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형통을 빼앗아 원수들에게 주셨다는 뜻이다. 죄는 죄 짓는 사람을 형통치 못하게 만든다. 죄로 인해 무너진 이스라엘의 모습에 대해서 “위로해줄 자가 없다.”(2절) “친구들도 배반하고 원수가 됨”(2절) “환난과 곤고 가운데 사로잡혀 가서 쉴 곳이 없다.”(3절) “탄식과 근심과 곤고”(4절) “자녀들도 사로잡혀가고”(5절) “모든 영광이 떠났고, 환난과 유리하는 고통을 당한다.”(6절) “보물을 주고 양식을 구했는데, 지금도 양식을 구한다”(11절) 즉 <어려운 형편이 그치지 않고 계속된다>는 뜻이다. 죄는 형통을 주지 않고, 슬픔을 준다. 그런데 사람들이 죄 짓는 이유가 무엇 때문인가? 사실 형통함을 위해서 죄를 짓는 것 아닌가? 사람들은 자기의 행복을 위해서 눈 딱 감고 죄를 짓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뭐라고 하는가? 죄는 형통이 아니라, 멸망과 슬픔을 준다는 것이다. 죄는 바다의 암초와 같다. 바다의 암초는 군함은 보내주고, 고기잡이 배만 부수는 것이 아니다. 바다의 암초에 부딪히면, 고기잡이 배든, 군함이든, 모두 다 망가지고, 파괴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자기 마음대로 사는 사람의 인생은 형통할수 없다. 물론, 우리가 볼 때에 믿지 않는 자가 세상에서 형통한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그러나 여러분이 <눈에 보이는 현실>보다 <말씀>을 신뢰한다면 결국에는 망하고 말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라. 죄는 형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슬픔과 멸망을 줄 뿐이다. 죄를 품지 않고 멀리하는 자는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인해, 결국은 형통하게 될 것이다. 죄를 멀리해야 형통할 것을 믿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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