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행19:8-20
제목:믿음의 정의
▶첫째, 믿음은 흉내가 아니라, 관계이다.
11-12절에 보면, 직접 손으로 안수하지 않고, 바울의 몸에 있는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자의 몸에 얹으니 병이 나았다는 것은 참으로 희한한 능력이 아닐 수 없다. 사실 우리 모두는 바울에게 일어난 이러한 기적이 나에게도 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지 않는가? 그러나 11절에 나타난 기적은 하나님께서 바울의 이름을 높여주기 위해서 행하신 기적도 아니고, 병자들의 병을 고쳐주시기 위한 기적도 아니었다. 모든 것은 바울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예수님과의 관계 속에 있는 사람이 어떤 복에 거하게 되는가>를 증거하시기 위해서 역사하신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주님과의 관계는 관심이 없고, 오직 기적이라는 결과에만 관심을 가진다. 그래서 기적을 흉내내는 사람들이 생긴다.(13-14절)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아들은 주님과의 바른 관계를 힘쓰지 않고, 그저 예수의 이름만 이용하여 기적이라는 결과를 가져오려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예수의 이름을 말한다고 해서 귀신이 두려워하고 쫓겨가는 것이 아니다. 귀신은 그런 모습에 “너는 누구냐”(15절)하면서 조롱한다. 주 예수의 이름이 귀신들에게 통하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귀신에게 당하여 도망치는 신세가 된다. 이것은 <믿음이란 것이 흉내 낸다고 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다. 귀신은 믿음을 흉내 내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귀신이 두려워하는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은혜로 사는 사람”이다. 자신의 힘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주님의 은혜를 바라보며 사는 사람이야말로 귀신이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여러분,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지 못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을 사용했다고 해서, 능력이 주어질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예수>라는 이름에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능력자이신 예수님과 바른 관계에 있는 것>이 능력이다. <능력>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을 때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것이지, 어떤 방법과 수단, 공식을 동원한다고 해서 복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신앙은 흉내가 아니라, 관계>이다. 하나님과 어떤 관계로 살아가고 있는가? 성도가 하나님 안에 거할 때 세상에 지지 않고 마귀에 지지 않게 됨을 믿으라.
▶둘째, 믿음은 과거와의 단절이며 포기이다.
스게와의 일곱아들이 당한 일이 에베소에 사는 사람들에게 알려지자, 오히려 그것 때문에 예수님의 이름이 높아지게 되었고,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다. 그래서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들이 마술에 관련된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불태우는 일이 일어났다. 19절을 보면, 불태운 책들의 값만 <은 오만>이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은>은 은화 1드라크마를 의미한다. 은화 1드라크마는 노동자의 하루품삯인 한 데나리온과 동일한 가치의 화폐였다. 그러니까 <은 오만 드라크마>는 50,000일 동안 일한 품삯에 해당된다. 이는 대략 한 사람이 <137년>동안 일해야 모을 수 있는 엄청난 돈이다. 오늘날 노동자 하루 임금을 한국돈 10만원이라고 하면, 약 50억원에 해당하는 책을 불태운 것이다. 여기서 생각해야 하는 것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었다”고 하면 되지, 왜 이런 장면을 설명하냐는 것이다. 성경은 이것을 통해 믿음이 무엇인지를 말씀하신다. <믿음이란, 과거와의 완전한 단절과 포기와 희생이 수반되는 것>이다. 여러분, 복음에는 능력이 있다. 그것은 사람을 달라지게 하는 능력이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면 반드시 인생에 변화가 일어나게 되어 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예수 믿기 이전과 달라진 것이 없다고 한다면, 그 사람의 믿음은 참 믿음이 아닌 것이다. 믿음이란 에베소의 사람들이 은 오만 드라크마의 책을 불살라 태워버린 것처럼, <과거와의 완전한 단절>이어야 하고, 또 <그에 상응하는 댓가를 지불하는 모습>으로 나타나야 한다. 왜냐하면 믿음은 곧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기 때문이다.(막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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