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행 15:36-16:5
제목: “마가 요한은 누구인가?”
예수님을 영접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도 구원을 받기 위해서 유대인처럼 할례를 받고 율법의 규정을 온전히 준수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이방인 선교를 하고 있는 바울과 바나바는 이 주장을 반박합니다. 현장에서 사역을 하다 보니 성령님께서는 민족과 문화와 언어에 상관없이 역사하시고, 성령의 세례를 이방인들에게도 허락하셨다는 겁니다. 베드로 역시도 바울과 바나바에게 동의를 하고 결국 예루살렘 공의회에서는 하나님께서 유대인과 이방인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구원을 베풀어주신다는 중요한 교리를 확정합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더없이 완벽한 동역자였죠. 그래서 한 번 더 전도여행을 가기러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이견이 생깁니다. 37절부터 39절 말씀을 볼까요.
37절에서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38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39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울을 교회로 소개한 바나바였고, 바울을 교회의 사역자로 세운 것도 바나바였습니다. 게다가 바나바가 선배였죠. 그런 바나바의 제안과 결정에 바울은 반기를 드는데요. 바나바의의 조카였던 히브리어로 마가 헬라어로 요한이라 불리는 마가 요한을 전도여행에 다시 합류시키자는 것에 바울이 반대합니다. 마가 요한은 사역 도중에 도망가버린 사람을 데려갈 수는 없다” 이것이 바울의 주장이습니다.
성경을 보니까 바울과 바나바가 이 일로 심히 다투었다고 하고, 결국 끝까지 의견을 좁히지 못한 채로 갈라져버렸다고 했습니다.
참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죠? 모두 성령 충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에베소서 4장 3절 말씀을 보면 나중에 바울이 에베소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이런 말을 했어요.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성령님은 하나 되게 하시는 분이시기에. 교회가 사역을 할 때는 반드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심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령 충만했던 바울과 바나바는 평안 대신 다툼, 하나 됨보다는 갈라짐을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성령의 역사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참으면 안 될까요? 우기지 않고 그냥 포기하면 안될까요? 성도님들은 마가도 함께 데려가자는 바나바가 옳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마가는 안된다는 바울이 옳다고 생각하십니까?
먼저 바울의 주장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성품 중에는 ‘공의’라는 성품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시고, 거룩하십니다.
하나님은 죄가 없으시고, 완전하십니다. 하나님은 죄를 심판하시는 분이시며, 우리가 불의와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꼐로 돌아오기를 바라십니다. 바울은 이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 그리고 공동체의 질서에 좀 더 무게를 두면서 판단을 했던 것 같습니다.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종종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을 보곤 합니다. 교회 안에도 사건 사고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교회라고 사회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사회에서 발생하는 문제가 고스란히 교회 안에서 발생한다고 해도 그리 틀린 이야기가 아닙니다. 말로는 거룩함을 말하지만 행동이 그러지 못하면 더 위선과 가식처럼 느껴지잖아요.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교회와 성도들에게 실망하는 겁니다.
바울은 이런 문제에 있어서 마가 요한을 엄하게 다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마가는 공동체의 질서를 어지럽혔습니다. 분명 선교를 떠나기 전에는 사람들 앞에서 헌신의 결단을 하고, 교회의 위임을 받고 파송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세웠던 결단을 너무나 쉽게 저버렸던 마가 요한입니다. 이런 사람을 어떻게 신뢰할 수 있겠으며, 이런 식으로 교회의 결정을 쉽게 저버린다고 한다면 이러한 사례가 계속해서 반복될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바울의 결정과 주장이 충분히 납득이 되는 부분이죠.
하지만 또 한편으로 바나바의 주장도 일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품 중에는 사랑과 자비의 성품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번 실수하고 실패한 사람을 단칼에 그냥 버리시는 것이 아니고, 고쳐서 쓰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보면 그러한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어떠했습니까?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사람이죠. 하지만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베드로에게 세 번 이나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를 회복시키셔서 사용하신 것이죠. 우리도 똑같은 사람들 아닙니까? 바나바의 입장에서는 바울도 그런 사람 중에 한 사람으로 생각했겠죠. 바울 역시 예수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고, 잡아 죽였던 사람입니다. 바울이야 말로 예수님을 섬기기에 완전히 부적격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사랑과 긍휼은 그 모든 것을 용서하고도 남음이 있었습니다. 오히려 죄인을 사용하시죠. 바나바는 예수님께서 실패한 마가도 고쳐서 사용하실 것에 대한 분명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아니, 어쩌면 이미 마가는 자신의 잘못과 실수를 회개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준비되어있었을 수도 있었다고 봅니다. 마가 안에 있던 가능성을 본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을 보는 것은 바나바의 특별한 은사입니다.
바울의 주장인 하나님의 공의도 바나바의 주장인 하나님의 사랑도 이 두 의견 모두 하나님의 성품에 근거합니다. 한쪽은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 또 한쪽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에 근거해서 자기주장을 펼치는 것이죠. 물론 바울과 바나바도 사람인데, 왜 자기주장과 이해관계가 없었겠습니까. 마가 요한은 바나바의 조카였기에, 마가 요한의 편을 더 들어주었을 것이고요. 사도행전에 드러나지는 않지만 바울에게는 바울을 따르는 디도나 누가, 또 실라와 같은 동역자들이 있었기에, 좀 더 자기가 주도적으로 선교사역을 이끌고 싶었을 수도 있습니다.
목사님들마다 이 사건에 대하여 다른 판단을 하곤 합니다. 어떤 분들은 바울에게 너그러움이 없었고, 훗날 마가를 다시 받아줌으로써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였다고 설교를 하십니다.
또 어떤 분들은 반대로 바나바가 마가와의 혈연관계 때문에 공적인 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말을 합니다. 사적인 정 때문에 선교팀을 깨뜨렸다는 말입니다. 다시 여러분들이라면 어떤 쪽 의견에 손을 들어주시겠습니까?
아시는 것처럼 사실 바나바의 결정도 완전하지 않고, 바울의 결정도 완전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늘 치우치게 됩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완전한 공의와 사랑으로, 이 두 성품의 완전한 균형을 이루십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십자가로 공의와 사랑을 동시에 만족시키시는 것이가능할 것입니다. 우리가 사도행전 말씀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것이 바로 이겁니다. 바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것. 또 성령님께서는 결국 하나 되게 하신다는 것이죠. 분명 인간은 실패했지만, 하나님은 모든 인간의 실패를 넘어 일하십니다.
먼저는 15장 40절과 41절 말씀입니다. “40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41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니며 교회들을 견고하게 하니라”
바나바와 마가 요한은 배를 타고 구브로로 갔습니다. 1차 전도여행의 여정을 따르는 것이죠. 바나바는 여기 키프로스 출신이기도 했고요. 바울이 제안한 목적, 1차 전도여행 때 세웠던 교회들을 더 견고하게 하기 위해서 먼저 떠났습니다. 바울과 비록 갈라지긴 했지만 복음을 전하기 위한 사명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바나바는 마가 요한을 더욱 더 견실한 하나님의 일꾼으로 성장시키는 사역까지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훗날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서 빌레몬에게 편지를 쓸 때, 빌레몬서 1장 24절에서 “또한 나의 동역자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가 문안 하느니라” 동역자 이름의 첫 머리에 마가를 언급합니다. 또 디모데 후서 4장 11절에서 디모데에게는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라고 바울이 편지를 적어 보냈습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성령님께서 행하신 일입니다. 마가를 변화시키시고, 또 바울의 마음도 감동시키셔서 관계를 회복시키신 것이죠. 결국 이 마가는 마가복음이라는 사복음서중에서 가장 먼저 된 복음을 기록한 사람이 됩니다. 대단한 영광이죠.
한편 바울은 실라라고 하는 새로운 동역자를 선택해서 시리아와 바울의 고향인 길리기아로 다니면서 교회들을 견고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도 훌륭한 동역자를 허락해 주셨죠. 바울과 함께 감옥에라도 갈 수 있는 복음의 일꾼이요, 증인이 바로 실라였습니다. 바나바와 마가가 해로를 따라 2차 전도여행을 떠났다면, 바울과 실라는 육로를 통해서 선교 사역을 감당합니다. 또한 사도행전 16장 1절부터 3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또 다른 동역자를 붙여주셨는데 바로 디모데입니다. 디모데는 바울의 영적인 아들로써 이 디모데와 함께 나머지 선교사역을 완성합니다. 중요한 것은 비록 서로 의견이 달랐지만 바울과 바나바는 모두 성령님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하나님께서는 이 두 사람의 사역을 통해서 하나의 선교팀을 두 개로 부흥시키는 놀라운 일을 이루어가십니다. 지금 당장은 갈라진 것처럼 보였지만, 한 성령님 이라는 진리 아래 두 사람 모두를 증인으로 부르시기에, 그 선교적 사명과 목적 아래에서 일하게 하십니다.
사도행전을 통해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선교의 역사는 성령님께서 이끄신다. 사도행전은 사도들의 행전이기에 앞서 성령님이 일하시는 성령행전이다.” 아멘
성도님들 이 말을 오해하시면 안됩니다. 교회에서 싸워도 된다. 갈라져도 된다 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것 조차도 하나님은 사용하셔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를 이루어 나가신다는 것입니다. 성도님들 바라옵기는 우리들의 삶을 통해 하나님 영광 받으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모든 성도님과 우리 교회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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