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행7:54-8:3
제목:성도의 마땅한 일
▶첫째, 말씀에 올바르게 반응하는 것이 성도의 마땅한 자세이다.
행6:12에 의하면, 스데반을 돌로 친 사람들은 종교최고기관인 산헤드린공의회 사람들이었다. 성경을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산헤드린공의회 사람들이 말씀을 듣다가 이를 갈고 귀를 막았다는 것이다. 본문에 “이를 간다”는 말은 헬라어로 “부루코”로서, 본래 “물어뜯다”라는 뜻으로 사람을 위한 표현이 아니라, <짐승>에게나 사용되는 말이다. 그런데 설교를 듣고 나서 산헤드린 공의회 사람들이 마치 짐승같이 반응했다는 것이다 왜 말씀을 듣는데 이를 갈고 귀를 막는가? 두 가지 이유가 있다. ①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사람의 말로 들을 때 그럴 수 있다. ②말씀이 마음을 찌르기 때문에 이를 갈수 있다. 54절의 “마음에 찔려”라는 말의 헬라어 “디아프리오”는 “양심에 가책을 받았다”는 뜻이 아니라, “마음이 분노로 가득했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 마음에 찔려 양심의 가책을 받고 회개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분노로 가득했다>는 것이다. 여러분, 왜 말씀을 듣는데, 마음이 분노로 가득할까? 마음의 생각이 악하기 때문이다. 마음의 생각이 악하면 말씀 앞에서 회개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분노가 일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짐승처럼 이를 갈며 귀를 막은 것이다. 행2장에서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면서 회개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스데반의 설교를 듣던 사람들은 소리를 지르고 귀를 막았다. 어떤 이는 말씀 듣다가 회개하는데, 어떤 이는 말씀 듣다가 분노하고 귀를 닫는 것이다. 지금 여러분은 어떤 자세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있는가? 간절히 권면하는데, 오늘 본문에 나온 사람들처럼 반응하는 사람들이 되지 말기 바란다. 왜냐하면 그 결국이 불행하기 때문이다. 성령께서 죄를 지적하거나, 또는 목회자가 강단에서 책망하거나, 또는 교우들이 허물과 실수를 지적하면 분노하며 귀를 막는 것이 아니라, 겸손하게 회개하는 성도가 되라. 만약 그렇게 하지 않고, 책망과 지적을 무시하거나, 또는 책망하는 사람에게 분노하면, 나중에 어두운 곳에서 이를 갈고 후회하는 신세가 될 가능성이 크다.
▶둘째, 보이지 않는 것에 주목하는 것이 성도의 마땅한 자세이다.
55-56절에 가장 많이 반복되는 단어는 “보다”라는 말이다. 특별히 “주목하다”는 “집중해서 본다”는 뜻이다. 56절의 “보라”도 주목하라는 뜻이다. 스데반은 <하늘을 주목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님을 주목하는 사람>이었다. 만약 우리가 스데반이었다면, 지금 사람들이 분노하면서 귀를 막고 이를 갈면서 돌을 던지려고 하는데, 그 상황에서, 어디에 주목할 것인가? 혹시 하나님보다 나를 향해 분노하는 사람,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에게 더 주목하고 있지 않은가? 가정에 물질의 문제가 생기고, 질병의 문제, 자녀의 문제가 발생할 때, 그 때 여러분은 어디에 주목하시는가? 보이는 물질인가? 아니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인가? 보이는 질병인가? 아니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신가? 사람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보다, 눈에 보이는 것에 주목하는 것이 본능적으로 쉽고 빠르다. 주목할 필요조차 없이 자연스럽다. 그러나 반대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주목하려면 본능을 억눌러야 하기 때문에 상당한 노력과 훈련, 연습이 필요하다. 우리가 하나님을 주목하는 사람이 되려면 날마다 자기를 말씀 앞에 세워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육신적인 문제들과 현실적인 문제들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주목하지 못하게 방해한다. 여러분, 더러운 사탄마귀는 과거에 스데반에게 돌을 던졌던 것처럼, 오늘 우리에게도 돈을 던지고 있다. 사탄은 <물질이라는 돌>을 던지고, <질병이라는 돌>을 던지고, <자녀양육이라는 돌>을 던진다. 어떤 때는 남편의 말, 아내의 말, 교우들의 말이 돌이 되어 우리에게 날라온다. 그 때 여러분의 눈은 어디를 주목하는가? 스데반처럼 보이지 않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하늘의 하나님께 주목하는 사람이 되시기 바란다. 고난의 순간에도 고난이 아닌, 주님을 주목하는 성도 되시길 축원한다.
▶셋째, 어떤 상황에서도 기도하는 것이 성도의 마땅한 자세이다.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60절) 돌에 맞아 죽는 스데반이 이 세상에 마지막 남긴 말은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였다. 즉 그는 최후의 순간까지도 기도했던 것이다. 스데반은 언제 무릎을 꿇었는가? 돌에 맞아 생명이 위태로울 때였다. 화가 난 무리의 고함소리, 온갖 저주의 말들과 많은 돌이 날라오는 상황에서 기도를 드린 것이다. 얼마나 귀한 모습인가? 이게 어떻게 가능할까? 한 번도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 갑자기 돌에 맞을 때 기도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 늘 기도하며, 하나님만 바라본 사람만이 위기의 순간, 최후의 순간에도 기도할 수 있다. 늘 기도하는 사람은 실패했을 때도 기도할 수 있고, 아플 때도 기도할 수 있다. 가장 힘든 순간에,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 화를 내는 것이 당연한 사람이 되지 말고, 주님께 기도하는 것이 당연한 사람이 되길 축원한다.
댓글 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