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행 7:17-29
제목: 어느 교회 집사님이신지
6장에 보시면 일곱 집사를 세우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는데요 ‘사도들이 말씀을 가르치기 보다 구제에 힘쓰다 보니 너무 비효율적이라는 생각에 이 일을 맡아서 할 사람들을 따로 뽑습니다. 그 사람들을 집사라고 부르는데요... 그 자격 기준이 이렇습니다. 6장 3절입니다.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그러니까 지금 여기 계신분들이 집사 이상은 되시는 분들이니까? 지혜와 성령이 충만하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칭찬받는 분들 이신거 맞는거죠?
암튼 이 성령충만하고 칭찬받는 스데반 집사가 “예수는 그리스도라 전하자”또 한번 소란이 일어납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모여 이 스데반을 잡으려고 거짓 증인까지 섭외하고 결국은 공회 앞에 세웁니다. 그래서 어제부터 시작해서 목요일 스데반 집사님이 순교하기 까지의 최종 변론 바로 설교 내용이 7장의 주된 내용입니다.
어제 본문인 7장 1절이 이렇게 시작합니다. “대제사장이 이르되 이것이 사실이냐” 이것이 사실이냐는 말은? 지금 저 증인들이 너를 고발한 말이 사실이냐? 라고 묻는 겁니다. 거기에 대한 스데반 집사님의 대답이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하고는 자기가 만난 예수를 전합니다. 6장 10절을 보시면 “스데반은 성령이 충만하여 그들이 당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또 15절을 보니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많은 사람들이 스데반을 잡아 죽일려고 모였습니다. 그러면 좀 위축 될 만도 한대 전혀 요동 없이 예수님을 전합니다. 오히려 자기를 잡아 죽이려고 하는 이 기회를 활용하여 공회원들에게 예수를 전합니다. 이게 바로 증인의 삶입니다. 증인이 무엇입니까? 법정용어인데요. 목격자입니다. 그 목격하고 들은 바를 그대로 전하면 되는 것이 그들의 사명입니다. 그런데 왜 이게 문제가 됩니까? 요즘 재판이나 청문회에 나와서 다들 경제적인 이익과 친분에 따라 거짓 증언을 하기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레위기, 잠언, 전도서, 요한계시록과 복음서를 통해 이 거짓 증언을 용서하지 않겠다고 수 차례 말씀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빌라도 법정에 세우고 거짓말로 예수님을 공격했던 사람들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갔다고 증언한 군병들 그리고 오늘 스데반을 잡기 위해 이곳에 모인 많은 거짓 증인들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사명이 무엇입니까? 교회의 사명이 무엇입니까? 바로 이 증인의 삶입니다. 보고 들은 바를 그대로 전하는 것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하신 일을 널리 널리 자주 자주 말하는 것, 하나님의 업적을 하나님의 일을 널리 널리 전하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침묵하면 안됩니다. 우리를 증인으로 삶으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은 바로 이 증언의 삶. 바른 고백과 바른 교육이 이뤄져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 은혜가 함께 하시길 소원합니다.
스데반의 설교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여러분 아버지들이요 형들이요~ 여러분이 잘 아시는 아브라함을 부르신 이가 누구십니까? 아브라함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약속의 아들 이삭을 주셨고 이삭을 통해서 야곱과 요셉을 주셨고 형들은 요셉을 팔았어도 하나님은 그를 기억하시고 애굽의 총리로 삼아 그의 가족들을 기억하셨다 하는 것이 이 설교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그 결론이 “지금 너희들은 실수”를 하고 있다. 바로 너희가 죽인 예수가 그리스도이다. 를 증거하기 위해 계속적으로 인간이 실수했던 이야기를 다시 한번 기억해 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절대 실패하지 않으셔서 그 실수를 사용하셔서 결국은 승리를 이끄신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님들 하나님은 절대로 실수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고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는 일이라고 할찌라도 하나님은 인간의 실수와 실패를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일을 반드시 이루고야 마십니다. 그래서 전능하신 하나님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 만유의 주인이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내 생각 내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인간의 생각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구하는 우리가 되길 소원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모세가 등장을 합니다. 성도님들 모세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모세는 자기 의를 상징하는 사람입니다. 아브라함과 야곱이 자기 계획의 관점에서 실패 했다면 모세는 자기 의로 실패한 사람의 대명사입니다. 다시오 아브라함과 야곱이 자기 계획의 관점에서 실패 했다면 모세는 자기 의로 실패한 사람의 대명사입니다. 모세가 어떤 삶을 살았습니까? 모세가 태어났을 때 바로왕 아멘호텝 2세는 2살 아래의 모든 남자 아이들을 죽이라고 명령했습니다. 부모가 석달 동안은 숨기다가 도저히 형편이 되지 않아서.. 이 아이를 갈대상자에 띄어 보내게 됩니다. 그 때 마침(사실 성경에서 말하는 거의 모든 그 때 마침. 우연히 이런 말은) 하나님이 친히 개입하사 이런 뜻입니다. 그 때 마침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목욕하는 아멘호텝 2세의 딸 바샤 공주에 의해 이 아기가 발견되어 지고 그 공주의 보호 아래 이 아기가 길러지게 됩니다. 더욱 더 더 가가막힌 것은 모세의 친 어머니 이름이 뭐죠? 요게벳이죠? 그러니까 이 요게벳이 역사상 최초로 자기 자식에게 젖을 먹이면서 월급을 받는 아주 놀라운 하나님의 개입과 섭리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 이렇게 위트가 충만하신 분이십니다. 성경은 그 모세가 애굽 사람의 모든 지혜를 배워 그의 말과 하는 일들이 능하더라 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얼마나 잘 배웠겠습니까? 그 당시 최고의 선생님들이 이 모세를 지도했을 것입니다. 최고급 언어와 최고급 무술과 왕이 되려고 하는 최고의 학문들을 좋은 음식으로 모세를 양육했을 것입니다. 무남독녀인 외동딸 바샤공주의 양자 모세. 최고의 권세와 능력이 그에 손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40살에 사고가 납니다. 한 히브리 사람이 애굽 사람에게 당하는 것을 보고 애굽 사람 하나를 쳐 죽입니다. 그리고 다음날 이스라엘 사람들끼리 싸우는 것을 보고 말립니다. 그 때 사람들이 이렇게 말을 합니다. 27절 중반을 보시면 누가 너를 관리와 재판장으로 삼았느냐? 어제 애굽 사람을 죽임과 같이 또 나를 죽으려느냐 하고.. 참 이해 안 되는 장면이죠? 모세는 왕이나 다름없는 그 당시 최고의 권력자였습니다. 물론 역사적으로는 바사 공주가 죽고 그 다음 후걔자에 의해 견제를 받고 있는 그런 상황이였다고는 하나 왕족인데 그까짓 사람 하나 죽이면 어떻습니까? 그런데 모세는 냅다 도망을 갑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인간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으로 받는 것입니다. 오늘 이 모세 이야기의 열쇠는 출애굽기가 아닌 사도행전에 있습니다. 25절에 모세 이야기의 힌트가 들어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그는 그의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을 통하여 구원해 주시는 것을 깨달으리라고 생각하였으나 그들이 깨닫지 못하였더라“ 바로 스데반 집사님이 모세를 통하여 깨달은 바가 이렇습니다. 대단한 집사님이시죠? 그래서 어디 교회 집사님이냐 물어 본 것입니다. 모세는 자기 힘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해 보겠다고 마음 먹었습니다. 자기 힘과 자기 지혜와 능력으로 뭔가 해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자기 힘으로 애굽 사람 하나를 죽이는 것이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부분이 하나님의 생각과 달랐습니다. 혈기 왕성하고 애굽의 모든 학문에 능통했던 모세. 어쩜 그가 이스라엘을 구했을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건 하나님의 뜻이 아니였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 40살에 도망해서 40년 동안 양을 치며..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지식과 힘과 능력이 다 빠져 나갔을 때..더 이상 아무 소망과 낙이 없다고 느꼈을 쯔음에... 하나님이 찾아 오신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하나님이 미웠겠습니까?
성도님들 모세가 하나님을 미워했건 안했건 간에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구원은 인간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으로 받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모세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이에 모세는 너무 무서워서 미다안 땅으로 도망을 가고 거기서 숨어 살게 됩니다. 더 이야기를 하고 싶어도 내일 본문인지라...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댓글 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