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대상27:25-34
제목:다윗의 주변 사람들
어제 본문에서는 다윗왕국의 군대조직과 행정조직에 대해 언급하였습니다. 에브라임에서부터 단까지 게다가 다윗당시의 이스라엘은 최전성기라 헬몬에서부터 유브라데스까지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큰 영토였음에도 불구하고 한달씩 돌아가며 24000명 밖에 안되는
군사를 가지고 온 나라를 지켰다는 사실이 참으로 놀랍고 놀라울 뿐입니다. 그러니 다윗은 알고 있었던 것이겠죠? 나라를 지키는 것은 군사에 많고 적음에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음을 말입니다. 우리도 고걸 좀 알게 되길 소원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다윗 왕의 재산을 맡아서 관리하는 조직에 대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왕이 소유한 밭이 있었고, 왕이 소유한 포도원과 평야가 곳곳에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소유지를 경작하여 얻어진 수확물과 왕실 소유의 소떼, 낙타, 나귀떼, 양떼 등을 목축하여 왕실의 재정을 충당을 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많은 전쟁으로부터 얻어진 전리품, 그리고 정복한 나라들로부터 바쳐지는 조공 등으로 왕실 재정이 충분히 유지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 모든 수확물과 가축들과 전리품, 조공 등 다윗 왕의 재산을 맡아 관리하는 책임자들의 명단이 오늘 본문 25절부터 30절까지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성도님들 또 이 본문을 보고 있으면서 이런 생각이 드시겠죠? 도대체 이 내용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냐는 것입니다. 아주 좋은 태도입니다. 말씀은 듣고 지식을 늘리는데 있지 않고 삶에 적용할려고 듣고 읽는 것입니다. 그래야 보물입니다. 우리가 이 본문을 우리의 삶에 어떻게 적용해 볼수 있을까요? 저는 일단 이렇게 생각을 해봤습니다. 우리의 왕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해야 합니다. 맞죠? 아멘. 다윗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 각자 한 사람 한 사람, 각자의 재능에 따라 각자의 있는 자리에서, 왕이신 하나님으로부터 관리인, 즉 청지기로서의 임무를 임명받은 자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청지기는 주인의 것을 잘 관리하여 주인에게 이익을 끼치는 자입니다. 다시 한 번 더 강조합니다.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주인이시고 왕이신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것을 잘 관리하여 주인이시고 왕이신 하나님께,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사람이 바로 성경에서 말하는 청지기입니다. 아시는 것처럼 성경에 나오는 청지기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선한 청지기와 불의한 청지기입니다. 어떤 청지기가 선하고 진실한 청지기입니까? 베드로전서 4장 10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선하다'는 헬라어로 '칼로스' 입니다. '칼로스'는 '칭찬할만 하다, 뛰어나다, 유용하다, 소중하다' 이런 뜻을 가진 형용사입니다. 사전을 찾아보면 "마음과 삶의 순수함으로 인해 칭찬 받을 만큼 아름다운" 이런 선한 청지기는 일단 '마음과 삶'이 순수합니다. 그래서 칭찬받을 만큼 그 결과도 아름답습니다.
베드로 사도의 말처럼, 모든 성도는 각자 나름의 은사를 받은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은사를 관리하라고 맡기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맡은 청지기입니다. 그 은사는 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것이고,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잘 관리하고 활용하여 주인이신 하나님을 이롭게 하여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성도를 세우고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 서로 봉사하는 것입니다. 각자 맡겨진 자리에서, 각자에게 주어진 은사, 재능, 달란트를 잘 관리하여 서로 다른 이들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선한 청지기로서 우리가 마땅히 해야할 일입니다. 가정도 하나님의 통치가 미치는 하나님 나라 입니다.
직장도 하나님의 통치가 미치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사업장도 하나님의 통치가 미치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교회도 하나님의 통치가 미치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아멘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유익을 위해 우리에게 주신 은사를 최대한 활용하여 섬김으로써, 가정과 직장과 사업장과 교회를 더 아름답게 바꾸어가야 할 것입니다. 누가복음 12장 42절입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진실하다'는 헬라어로 '피스토스'입니다. '피스토스'의 일차적 의미는 '충성스럽다' '변함없다' '흔들림이 없다' 입니다. 그러니 '믿음직스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진실한 청지기는 한결같습니다. 남이 보든, 남이 보지 않든 한결같이 열심을 냅니다. 우리 가운데 얌체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남이 보는데서는 열심히 하는 '척' 합니다. 보지 않으면요, 대충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항상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살핍니다. 다른 사람들의 '평가'를 두려워 합니다. 아무도 없고,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하는 행동이 진짜 '나의 행동' 입니다. 한결같은 사람은요, 사람 눈치 안봅니다. 오직 한 분, 하나님의 눈치만 봅니다. 한결같은 사람은요, 사람들의 평가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오직 한 분의 평가에만 민감합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가정총무로 있을 때, 아무도 보지 않는 장소에 보디발의 아내와 단 둘이 있을 때, 하나님의 눈초리를 보았던 자입니다. 직장에서, 사업장에서 하나님의 눈초리 앞에서 하나님의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소망합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어떤 청지기가 옳지 않은, 불의한 청지기 입니까? '불의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아디키아' 입니다. '아디키아'는 마음과 삶의 옳지 않음입니다. 누가복음 16장 1절입니다. "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 불의한 청지기는 자신에게 주어진 것이 주인의 것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것으로 여기고, 주인의 것을 자신을 위해, 자신을 이롭게 하는 일에 허비하는 자입니다. 마음과 삶이 올바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게 주신 재산, 재능, 직장, 지식, 능력 이 모든 것이 주인이신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에 사용되도록 우리를 청지기 삼으셨는데, 그것을 나를 위한 일에 사용하면 하나님 나라는 손해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내 것을 내 마음대로 사용하는데 그것이 죄냐?"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라면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자라면 결코 내 것이라 주장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이 세상을 위해 유용하게 사용하라고 맡겨주신 것이고, 나는 단지 그분의 청지기일 뿐이다고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내 것이 아니기에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다른 사람을 섬길려고 하면 세상이 점점 아름다워질 것입니다. 부디 선한 청지기, 진실한 청지기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2절에서 34절까지는 다윗 왕조의 내각을 소개합니다. 여기에 또 하나 생각해 볼 진리가 있습니다. 성도님들 다윗은 하나님으로부터 사도행전 13장 22절에서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칭함을 받았던 인물입니다. 사무엘 선지자도 사무엘상 13장 14절에서 "여호와께서 그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그 백성의 지도자를 삼으셨느니라"이라고 하나님이 다윗을 인정하였음을 고백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과 일치된 사람이었습니다. 게다가 다윗은 나가기만 하면 승리하는 백전백승의 용사였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곁에는 숙부 요나단과 아히도벨과 아히도벨의 뒤를 이어 여호야다와 아비아달 등이 모사로 다윗을 도왔던 것을 본문에서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아렉 사람 후새는 다윗의 친구가 되어 늘 다윗과 동행하는 자였습니다. 요압은 군대지휘관이 되어 다윗 왕을 도왔습니다. 하나님 나라에는 슈퍼스타가 없습니다. 혼자서 이루어 갈수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다윗은 하나님과 관계가 좋았기에 직접 기도하여 모든 것을 결정할 수도 있었지만, 늘 가까이에 하나님의 지혜를 가진 모사들을 두어 그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과 함께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다윗은 싸움의 능한 자였기 때문에 직접 나가면 승리할수 있었지만 요압을 통해 군사를 다스리고 하나님의 명령을 따랐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우리는 쉽게 속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속에 내 마음의 욕심이 만들어낸 목소리를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얼마든지 착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돕는 자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하와를 '돕는 자' '에제르'로 주셨습니다. '에제르'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옆에서 함께 거들어 주는 존재가 아닙니다. 나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을 그가 도와 줄 때 비로소 완성시킬 수 있는 절대적인 도움자라는 뜻입니다.
예를 들면요, 아이를 낳는 것은 혼자 절대 안됩니다. 이렇게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돕는 존재가 '에제르'입니다. 요압이 다윗에게 '에제르' 였습니다. 그는 다윗의 인구조사 명령에 반대 의사를 분명히 하였습니다. 역대상 21장 3절에서 "요압이 아뢰되 여호와께서 그 백성을 지금보다 백 배나 더하시기를 원하나이다 내 주 왕이여 이 백성이 다 내 주의 종이 아니니이까 내 주께서 어찌하여 이 일을 명령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이스라엘이 범죄하게 하시나이까 하나" 하나님께서 독단으로 치우치지 말라고 곁에 '돕는 자' '에제르'를 붙여주셨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요압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습니다. 그 결과는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물론 아시는 것처럼 요압도 아히도벨도 여호야다도 잘못된 판단으로 하나님 나라에 어려움을 끼치기도 했습니다. 어떠한 사람도 완전한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인디안 속담중에 "빨리 가려거든 혼자서 가라. 끝까지 가려거든 함께 가라." 라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우리의 목적은 '빨리 가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가는 것'이어야 합니다. 또 끝까지 바르게 가야 하는 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함께 가야 합니다. 교회의 좋고 나쁨은 한 사람으로 특징되지 않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함께 모여 교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성도님들 바라옵기는 우리가 함께. 함께 함으로 하나님 나라를 위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우리 심천사랑의교회와 성도님들이 되시길 되시길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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