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삼하24:15-25
제목:하나님의 긍휼을 입으려면
은혜와 긍휼의 차이를 아는가? 은혜가 “자격없는 자에게 값없이 주는 선물”이라면, 긍휼은 반대로 “마땅히 주어야 할 것을 주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무슨 말이냐 하면, 죽어야 할 자에게 죽음을 내리지 않는 것. 심판 받아야 할 자에게 심판을 내리지 않는 것. 이것이 긍휼이다. 우리는 심판받아 마땅한 자에게 심판을 내리지 않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살아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가 가져야 할 진정한 신앙은 “하나님의 긍휼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 “하나님의 긍휼이 임하는가?
첫째, 회개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긍휼이 임한다.
다윗은 10절에서 인구조사를 한 자신의 죄를 회개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내리신 징계인 전염병이 내려 3일이 되기도 전에 무려 7만명이 죽는 것을 보자, 다윗은 17절에 또 다시 회개의 무릎을 꿇는다. 다윗은 칠만명이나 죽는 것을 보면서, 자신이 범죄하였고, 악을 행하였다고 회개한다. 모든 죄는 자신에게 있고, 백성에게 있는 것이 아니니, 자신과 자신의 아버지 집을 치라고 구한다. 그런데 전염병으로 죽은 칠만 명의 백성은 죄가 없는데, 다윗 때문에 억울하게 죽임당한 것인가? 아니다. 1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향해 이미 진노하셨음을 말씀한다. 즉 이스라엘 백성이나 다윗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다윗은 자기 책임이라는 것이다. 자신이 책임지겠다는 것이다. 자기에게 벌을 내려달라고 한다. 이것이 진실한 회개이다. 회개와 회피의 차이를 아시는가? 회개는 자기가 잘못임을 인정하고, 자기가 책임을 지겠다는 것이고, 회피는 자기에게는 잘못이 없다며,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다. 아담과 사울처럼, 남 탓을 하는 사람은 회개한 사람이 아니다. 자기 탓이며, 자기가 문제라고 인정하는 것이 바로 진정 회개한 사람이다. 성도는 회개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회개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긍휼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회개는 늦는 법이 없다. 회개하는 순간 재앙이 그치고, 문제가 해결된다. 그러므로 성도는 회개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둘째, 순종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긍휼이 임한다.
우리말에 “부모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고 했다. 하물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좋은 일이 생기지 않겠는가? 다윗의 장점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이면 이유를 달지 않는 것이다. 다윗이 비록 약점이 있고, 죄도 짓고 했지만, 그의 장점은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면 이유를 묻지 않는 것이다. 본문에 선지자 갓이 다윗왕에게 아라우나 타작마당에 가서 제단을 쌓으라(18절)고 하자, 군소리하지 않고 그대로 순종한다.(19절) 우리같으면 왜 언약궤가 있는 성막이 아니라, 이방인의 타작마당에서 해야 하냐고 분명 따졌을텐데, 다윗은 토달지 않고, 말씀 앞에 무조건 순종한다. 하나님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성도는 마땅히 순종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다윗이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긍휼을 입었던 것처럼, 우리 역시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긍휼을 입는 자가 되길 축복한다.
셋째, 예배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긍휼이 임한다.
“올라가서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으소서”(18절) 제단을 쌓으라는 것은 곧 제사를 의미한다. 그런데 구약의 제사에는 반드시 희생제물이 요구된다. 다윗이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것은, 제단을 쌓는 의식을 행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하나님의 긍휼을 얻게 하는 것인가? 바로 다윗에게 주어질 하나님의 진노를 대신 담당하고 죽은 제물의 희생을 통해서 진노와 심판을 피하는 하나님의 긍휼을 얻는 것이다. “그 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더니 이에 여호와께서 그 땅을 위한 기도를 들으시매 이스라엘에게 내리는 재앙이 그쳤더라”(25절) 이처럼 이스라엘에게 내리는 재앙을 멈추게 한 번제와 화목제가 말해주는 것은 이스라엘에게 내려지던 진노와 심판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진노와 심판이 <번제와 화목제의 제물>에게로 향했음을 보여준다. 즉 이스라엘의 재앙을 대신 담당한 제물로 인해 이스라엘에 임한 진노와 심판이 멈춘 것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제사>를 의미한다. 우리가 예배라는 행위를 했기에 하나님의 긍휼을 입게 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예배드릴 때, 우리를 향하던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대신 쏟아졌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피하는 긍휼을 입은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가 예배를 드리는 것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멈추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의지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는데, 다윗은 왜 제단을 쌓을 타작마당과 제물과 나무를 모두 무상으로 제공하겠다는 아라우나의 호의를 거절하고 굳이 값을 지불했냐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긍휼이 임하는 것은 인간의 호의나 선행으로 되지 않고, 오직 제물의 희생(주님의 죽으심)으로만 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도가 하나님의 긍휼을 입는 것은 그리스도의 의를 의지하는 것밖에 없다. 그것이 바로 <예배>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마땅히 <예배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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