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사무엘하 22:29-51
제목: 구원을 향한 노래
사무엘서는 이스라엘이 가장 사랑하는, 그래서 가장 자랑하는 다윗이 주인공입니다. 그러니 다윗이 잘한 일만을 모아 놓고 다윗을 향한 용비어천가를 부를만도 한데 이 사무엘상하는 절대로 다윗을 높이거나 다윗을 칭송하는 책이 아닙니다. 물론 모든 성경은 인간을 완전한 존재로 여기고 그를 높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부족한 다윗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높이고 찬송하고 자랑하는 책이 바로 사무엘상하이자 성경의 주제입니다. 이 사무엘하도 이제 거의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데요. 이 다윗의 인생을 한 마디로 정의하면 그것은 성공도, 출세도 아니고 바로 “하나님의 구원은 위대하다” 입니다. 너무나 잘 아시는 것처럼 다윗도 우리와 똑같이 연약하고 실수투성이인 문제 많은 인생이었습니다. 그러한 다윗을 하나님이 만나주시고 그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다윗은 다윗된 것입니다. 우리도 연약하고 부족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죠? 우리도 다윗 못지 않은 죄인들이지 않습니까?
다윗은 오늘 본문에서 자기 인생을 뒤돌아 보고 시를 지어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러다 보니 어렵습니다. 내 마음 나도 모르는데. 다윗의 마음을 어떻게 알까요? 그래도 오늘 본문을 보면 다윗의 마음을 어렴풋이나마 알수 있는데요. 먼저 다윗은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살아왔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등불이 되어주시고, 어둠을 밝혀 주시는 분이시기에 온전히 하나님만을 의지했습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시면 다윗은 어떤 상황에서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30절에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진으로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성벽을 뛰어넘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다윗은 어떤 상황에서든지 주님께서만 함께 하시면 두렵지 않고, 승리를 거둘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적이 얼마나 많은가? 얼마나 무기가 많은가? 우리는 어떠한가 이런 것을 묻고 따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함께 하시는지에 대한 여부였습니다. 그래서 맨날 이걸 묻습니다. 하나님 어떻게 할까요? 왜냐하면 주님께서 하시는 일은 완전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전 인생을 통해 느낀바는 주님께서 하시는 일이 언제나 완전했고, 주님의 말씀은 언제나 신실했습니다. 주님께만 붙어있어서 주님께 모든 일을 맡기고 주님이 행하시는대로 순종하며 살아갈 때 다윗은 언제나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께 붙어있고, 주님과 함께 하는 것이었습니다. 뛰는 놈위에 나는 놈 나는 놈 위에 붙어 있는 놈 이게 다윗이 추구하는 인생관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주님이 하시는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에 언제나 순종하며 따랐습니다. 그랬기에 다윗은 하나님이 주시는 고난의 훈련을 잘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강한 용사가 되도록 훈련시키셨습니다. 35절입니다. “내 손을 가르쳐 싸우게 하시니 내 팔이 놋 활을 당기도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훈련시킬 때 다윗은 전적으로 순종하며 그 훈련에 임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발을 암사슴의 발과 같게 하셨고, 다윗의 팔을 놋쇠로 된 활을 당길 수 있도록 훈련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마음에 담력이 생기도록 훈련해 주셨습니다. 육체적인 훈련뿐만 아니라 마음의 훈련도 주님께서 시켜주신 것이죠. 다윗은 주님이 행하시는 그 훈련의 손길에 묵묵히 순종하며 힘들고 고통스럽더라도 이겨냈습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이 언제나 완전하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언제나 신실하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주목해 볼 것이 하나 있는데요 우리는 흔히 오해하길 하나님께 붙어있으면 하나님과 함께 하시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하시기에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고 착각하며 살아갑니다. 그래놓고 하나님을 오해하거나 원망하기도 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하시기에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지만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해 보시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행하시지만, 그 모든 것을 사람을 통해서 하시는 분이십니다. 사람과 함께 하나님의 역사를 이뤄나가길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다윗은 그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다윗을 훈련시키신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전쟁에 나가서 승리를 거두게 하셨습니다. 이게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방법입니다. 38절에서 43절까지의 말씀은 다윗이 전쟁터에서 원수를 죽이고 승리하였다는 것을 고백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노를 발하여 적들을 죽인 것이 아니라 물론 그렇게 하실수도 있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다윗이 직접 가서 무찔렀습니다. 다윗이 원수를 진멸했습니다. 39절에서도 ‘내가 그들을 무찔러 전멸시켰더니 그들이 내 발 아래에 엎드러지고 능히 일어나지 못하였나이다’라고 고백하고, 43절에서도 ‘내가 그들을 땅의 티끌 같이 부스러뜨리고 거리의 진흙 같이 밟아 헤쳤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다윗이 직접 원수를 무찌르고 진멸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강한 팔과 강한 다리, 그리고 강한 마음을 갖도록 훈련시킨 후에 다윗이 직접 무찌르도록 하셨습니다. 오해하시면 안되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직접 무찌르고, 다윗이 직접 진멸했지만 다윗의 고백은 주님께서 행하셨다는 것입니다. 40절과 41절에 “이는 주께서 내게 전쟁하게 하려고 능력으로 내게 띠 띠우사 일어나 나를 치는 자를 내게 굴복하게 하셨사오며 주께서 또 내 원수들이 등을 내게로 향하게 하시고 내게 나를 미워하는 자를 끊어 버리게 하셨음이니이다” 아멘 이렇게 고백합니다. 결국 다윗이 원수들을 무찌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행하셔서 승리토록 준비하셨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우리가운데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동행하는 삶이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삶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훈련 가운데 훈련을 받고 그 훈련을 통해서 하나님과 함께 승리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의 강함과 능력으로 승리를 거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앞서 행하심으로 나는 승리를 누리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행하신 승리를 누리며 살았습니다. 이방 사람들이 다윗의 이름만 듣고도 두려워 떨며 다윗에게 복종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이처럼 놀랍게 행하시는 모습을 보고 주님의 이름을 찬양합니다. 47절입니다. “여호와의 사심을 두고 나의 반석을 찬송하며 내 구원의 반석이신 하나님을 높일지로다” 아멘 다윗은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선포합니다. 살아계시는 그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살아계시는 하나님은 다윗에게 반석이 되시고 구원자가 되시는 분이심을 선포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습니다. 감사가 넘쳤습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하기에 살아계시는 하나님께 찬양할 수 있는 지금의 삶이 너무나 행복했습니다. 죽음의 위기에서 건지시고, 구원하신 하나님의 능력에 감격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시는 것처럼 다윗은 왕이 되었지만, 주님 앞에서 춤추며 주님을 전심으로 찬양하는 모습이 전혀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죽음의 웅덩이에서 건지신 주님께 감사하며 찬양할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기뻤습니다. 다윗은 22장의 처음과 끝에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에 대해 고백할 때 반복적으로 고백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주님이 나의 반석이시고, 구원자이심을 선포합니다. 다윗에게 하나님은 언제든지 의지할 수 있고 피할 수 있는 구원의 반석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그 은혜에 감사하며 찬양합니다.
우리도 이 다윗의 찬양시를 보고 깨닮음이 있길 소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언제나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시며, 선하신 분이십니다. 이 사실을 믿는다면 우리는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지하며 나갈수 있습니다. 이 아픔과 고난조차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단련시키는 과정임을 알고 인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늘 슬픔속에서 하나님을 원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단련시키시는 것은 우리가 승리의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언제나 주님과 함께 함으로 승리하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언제나 바라보며 주님의 단련을 잘 감당하고, 주님만을 찬양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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