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삼하 19:31-43
제목: 화평과 분열
19장은 계속해서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복귀 하면서 만난 사람들을 소개하는 장면입니다. 다윗에게 일생에 가장 큰 아픔과 상처는 무엇이었을까요? 많은 어려움 중에서도 분명히 아들 압살롬의 반역이었을 것입니다. 아들에게 반역을 당하고 아들을 피해 도망가는 아버지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이 세상의 아버지는 다 자식들이 잘 되기를 소망합니다. 아마도 다윗은 자신이 아들 압살롬에게 배신을 당해 도망가면서도 압살롬이 자신보다 정치를 더 잘하고 나라를 더 잘 다스린다면 순순히 왕권을 내어줄 마음의 준비가 되었을 것입니다. 정말로 압살롬이 의로운 왕으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믿음으로 이스라엘의 왕이 된다면 다윗은 얼마든지 그의 나라를 아낌없이 내어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압살롬은 결코 있어서는 안되는 아버지를 배신하는 죄를 넘어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용서받지 못할 커다란 잘못을 저질렀으니 이를 바라보는 아버지 다윗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고 괴로웠을까요? 왕권을 빼앗겼다는 슬픔보다는 하나님의 의를 거스리고 천륜을 저버리는 저주받아 마땅한 극악을 행하고 있는 압살롬이 다윗은 더욱 안타깝고 가련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따르던 많은 신하들이 압살롬의 편이 되어 반란에 가담해도 다윗은 정신을 차리고 이성적으로 정상적으로 처리하지 못하고 모든 것을 체념한체 처량하게 도망가는 뒷모습은 다윗의 슬픔을 짐작케 합니다.
이런 다윗의 마음을 누가 알고 위로해줄까요? 그래서인지 다윗은 오직 하나님만 바라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였던 것입니다. 자기를 저주하는 시므이를 향해 “내버려 둬라. 이게 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이랬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피난가는 다윗을 따르며 다윗을 보호하고 다윗을 위해서라면 지금이라도 당장 목숨을 내 놓을 만한 충성을 다하고 있었지만 다윗은 슬픔속에서 고독하고 외로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외로워하고 괴로워하는 다윗을 찾아온 이들이 있었습니다. 토요일 본문이라 잘 기억이 안나시겠지만 사무엘하 17장 27절부터 보시면 “다윗이 마하나임에 이르렀을 때에 암몬 족속에게 속한 랍바 사람 나하스의 아들 소비와 로데발 사람 암미엘의 아들 마길과 로글림 길르앗 사람 바르실래가 침상과 대야와 질그릇과 밀과 보리와 밀가루와 볶은 곡식과 콩과 팥과 볶은 녹두와 꿀과 버터와 양과 치즈를 가져다가 다윗과 그와 함께 한 백성에게 먹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 생각에 백성이 들에서 시장하고 곤하고 목마르겠다 함이더라”
압살롬의 계획된 반란에 아무 준비도 없이 예루살렘성을 빠져나와 피난민처럼 도망가는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위해 ‘소비’와 ‘마길’과 ‘바르실레’가 광야에서 먹을 것을 준비해 온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준비해준 광야의 식탁이 어찌 왕궁에서 먹던 만찬보다 훌륭했겠습니까? 그러나 예루살렘 왕궁에서 진수성찬으로 차려진 기름진 식탁보다 더 따뜻하고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원래 그런거잖아요? 내가 너무나 지칠 때 힘들때 죽도록 외로울 때 찾아와 아무 말 없이. 친구야 밥먹자 하는 그 손길이 얼마나 고마운지요? 아마 다윗은 평생 그 고마움을 잊지 못했을 것입니다. 당시 다윗은 마하나임에 거했는데 그때 바르실래는 음식을 준비하여 다윗과 그를 따르던 백성들을 대접했던 것입니다. 쉽지 않은 행동입니다. 지금 압살롬이 이스라엘의 새로운 왕이 되어 다윗을 죽이러 가는 길입니다. 나중에 바르실래가 다윗을 섬겼다는 소식을 듣는다면 이 바르실레 역시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 분명합니다. 이럴때는 가만히 있는게 최선이겠죠? 그럼에도 바르실레는 다윗과 따르는 자들을 정성껏 섬겼습니다. 성경은 이 섬김이 일회적인 섬김이 아닌 반복적인 섬김이라고 기록합니다. 그리고 나서 압살롬이 죽고 반란은 진압되고 다윗은 다시 예루살렘성으로 돌아가기 위해 마하나임에서 요단강을 건너려 했습니다. 이때 바르실래는 요단강을 건너가는 다윗을 배웅하기 위해 늙은 몸을 이끌고 배웅을 합니다. 다윗왕은 자신을 후하게 대접하고 자신을 배웅하기 위해 먼길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온 바르실래에게 함께 예루살렘에 가서 노후를 편안하게 대접받으면서 살자고 말합니다. 그만큼 다윗이 느끼는 큰 고마움을 이렇게 보답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요청에 바르실래는 겸손히 거절합니다. "내 생명의 날이 얼마나 있사옵겠기에 어찌 왕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리이까" 그의 나이는 이미 팔십세라고 말합니다. 바르실래는 이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기에 고향에서 조상들의 땅을 지키면서 여생을 마치겠다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 35절인데요. "내 나이가 이제 팔십 세라 어떻게 좋고 흉한 것을 분간할 수 있사오며 음식의 맛을 알 수 있사오리이까 이 종이 어떻게 다시 노래하는 남자나 여인의 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사오리이까 어찌하여 종이 내 주 왕께 아직도 누를 끼치리이까“ 누라는 단어는 짐이라는 단어입니다. 그러면서 한가지 부탁을 합니다. 37절입니다. "청하건대 당신의 종을 돌려보내옵소서 내가 내 고향 부모의 묘 곁에서 죽으려 하나이다 그러나 왕의 종 김함이 여기 있사오니 청하건대 그가 내 주 왕과 함께 건너가게 하시옵고 왕의 처분대로 그에게 베푸소서 하니라"참 이 본문이 신기하고 놀라워서 여러 군대를 찾아 봤습니다. 왜? 바르실래는 그의 종 김함을 다윗왕에게 부탁했을까요? 아브라함처럼 바르실래도 자식이 없었을까요? 만일 바르실래에게 자식이 있었다면 자식을 왕에게 부탁하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왕상2:7에 보면 다윗이 솔로몬에게 마지막으로 유언을 남기는데 "마땅히 길르앗 바르실래의 아들들에게 은총을 베풀어 그들이 네 상에서 먹는자 중에 참여하게 하라" 다윗의 유언을 보면 바르실래에게는 아들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본문을 바르실래의 아들 중 하나라고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그의 종 즉 그의 아들인 김함에게 베풀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바르실래의 바램대로 그의 아들 김함을 데리고 가서 왕궁의 사람으로 만들어줍니다. 그리고 그 섬김을 기억하고 있던 다윗이 죽기전에 믿을만한 아들 솔로몬에게 바르실래의 아들들에 대해서 유언을 남기는데요 "마땅히 길르앗 바르실래의 아들들에게 은총을 베풀어 그들이 네 상에서 먹는 자 중에 참여하게 하라" 아멘. 그 후 김함에 대한 이야기가 없습니다만 예레미야 41장 17절에 ‘베들레헴 근처에 있는 게롯 김함” 이라는 단어가 등장을 합니다. 게롯은 여관이라는 말입니다. 성도님들 다윗의 고향이 어디입니까? 바로 베들레헴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고향땅의 한 몫을 다윗에게 은혜를 베푼 바르실래를 대신하여 김함에게 준 것으로 추측할수 있습니다. 그곳에서 김함의 후손들은 베들레헴 즉 예수님이 태어나신 땅에서 여인숙을 한 것입니다.
이렇게 은혜롭게 본문이 마쳐야 되는데 아쉽게도 이스라엘과 유다의 대립으로 오늘 본문은 마무리가 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왕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유다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데 주도하는게 맞는 일입니까? 왜 이렇게 묻습니까? 다윗왕을 반역한 중심에 유다족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유다가 다윗을 왕으로 만들고 이제는 압살롬을 왕으로 만들었다가 다시 다윗왕 왕으로 복위시키는 과정이 이스라엘 열지파 사람들에게는 불만이었을 것입니다. 왜 열지파냐면 베냐민은 유다와 거의 한 지파라고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공격앞에 유다지파도 큰 소리를 냅니다. 다윗왕은 우리의 종친이다. 이스라엘 지파들아 그냥 미안하다. 우리가 잘못했다. 이제는 안 그러겠다. 이러면 끝났을 텐데 이번에는 유다 지파가 다윗의 혈통을 거론하며 이스라엘을 비난합니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합니까? 밧세바 사건 이후 죄의 결과로 이스라엘을 찟으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기 때문입니다. 계속 말씀드리지만 죄는 이처럼 치명적이고 죄는 이처럼 살아서 역사하는 무시무시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회개해서 하나님이 용서해 주셨지만 결국 이 죄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은 분열하고 나눠지는 단초를 제공해 줍니다. 이것이 죄의 결과입니다. 성도님들 오늘 본문인 19장은 다윗의 복귀하면서 만난 사람들의 대한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들을 다윗을 은혜로 어떤 사람들은 다윗을 업신여겼지만 다윗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은혜를 갚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용서하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갑니다. 성도님들은 어떤 사람이십니까? 깨어지고 어그러진 하나님과 관계속에서 고통당하고 있는 성도들에게 화평을 전하는 사람입니까? 아님 분열을 조장하는 악의 도구로 사용되고 계십니까? 우리 믿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은 성도들은. 이 세상과는 다르게 하나님의 화평을 전하는 피스메이커로써 하나님과 세상을 연결하는 중보자이신 예수님을 소개하고 전하는 자로써 우리에게 주신 화평케하는 소명을 잘감당하는 우리들 되길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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