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삼하1:1-16
제목:다윗의 눈물
본문은 <사울이 죽었다는 소식을 다윗이 듣게 되는 내용>이다. 여러분이 다윗이라면, 사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 어떤 반응을 하시겠는가? 솔직히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고 했던 원수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사울이 죽었다는 것은 다윗에게 기쁨의 소식이 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다윗은 본문에서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울의 죽음을 애통한다.(11-12절) 다윗은 왜 슬퍼하며 울었을까? 다윗이 사울의 죽음 앞에서 슬퍼하며 우는 그 속마음은 어떤 마음일까?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또 한 사람이 등장하는데, 바로 사울의 죽음을 이용하여 이득을 얻고자 했던 아말렉 사람이다. 그는 자신이 사울을 만나고 죽이게 된 과정을 말하면서, 그 증거물로 사울의 왕관과 팔찌를 다윗에게 보여준다.(10절) 그러나 어제 본문 삼상31장에서 사울이 죽는 내용을 보면, 아말렉 사람의 말은 거짓말이 분명하다. 사울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것이지, 아말렉 사람의 손에 죽은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 아말렉 사람은 왜 다윗에게 사울을 자기가 죽였다고 거짓말을 하는 것인가? 그것은 사울이 다윗의 원수인 것을 알기에, 사울을 죽였다고 하면 큰 보상을 줄 것으로 기대하고 거짓말을 한 것이다. 아말렉 사람의 목적은 <자신의 이익>이었다. 사울의 죽음을 이용해서 <물질적 이익>을 얻으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아말렉 사람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사울이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아말렉 사람에게는 <사울이 기름부음받은 자라는 사실>이 아무 의미도 없고, 관심도 없는 사항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말렉사람은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죽임을 당하게 된다. “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 죽이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냐 하고 다윗이 청년 중 한 사람을 불러 이르되 가까이 가서 그를 죽이라 하매 그가 치매 곧 죽으니라”(14-15절) 아말렉 사람에게는 사울이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이 전혀 관심밖에 문제였는데, 다윗은 바로 사울이 기름부음 받은 자였기 때문에 아말렉 사람을 죽였다. 지금 두 사람은 <사울의 죽음>을 두고 전혀 상반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아말렉 사람은 사울의 죽음을 이용해서 자신의 이익을 꾀하는 사람이다. 이것은 오늘날로 적용하면, 예수님을 믿는다 하면서,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는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물론 사울이 예수님과 같다는 뜻은 전혀 아니다. 그러나 <사울이 하나님의 기름부으심을 받았다>는 점에 중점을 둘 때, <하나님께서 세운 사람>이라는 것을 무시하고, 자기 이익을 보려고 하는 아말렉 사람의 모습에서, 오늘날 십자가를 말하고, 예수를 말하지만, 예수를 이용해서 자기 이익을 꾀하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해야 한다. 우리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나도 십자가를 지겠노라고 결단하는가? 아니면 십자가의 예수 앞에 나 좀 잘 되게 해달라고 구하고 있는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바로 우리 때문인데, 그것을 생각하지 않고, 예수님을 이용하여 부자되고, 건강해지고, 성공할 생각만 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 아닌가? 이것이 아말렉 사람의 신앙이다. 그러나 다윗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다윗이 아말렉 사람을 죽인 이유의 중심에는 사울이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이 있다. 다윗이 사울의 죽음에 대해 애통하고 슬퍼하는 것은 착한 마음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사울이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사람>이라는 것 때문이다. 만약 사울이 기름부음을 받지 않았다면, 사울은 예전에 벌써 다윗의 손에 죽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다윗으로 하여금 사울을 죽이지 못하게 막은 것은 “살인하면 안된다”는 <양심>이 아니라, <사울이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사람>이라는 신앙적 이유 때문이었다. 여러분, 다윗의 관심사는 <오직 하나님>이었다. 내일 본문 19절에 보면, “이스라엘아 네 영광이 산 위에서 죽임을 당하였도다”라고 애통해 한다. 사울의 죽음을 <이스라엘의 영광의 죽음>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사울왕이 이스라엘의 영광으로 불려질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다윗이 사울을 이스라엘의 영광으로 부르는 이유는 <사울에게 하나님의 기름부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기름을 부어 세우신 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과 영광을 위해서>였다. 그러나 사울은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자기의 영광과 이익만을 생각했다. 그러나 다윗은 오직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만을 바라보고 있다. 그가 사울의 죽음에 애통해 하는 것도 역시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이 다윗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나오는 애통이었다. 하나님께서 아말렉 사람과 다윗을 대조시키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자기 이익을 위해 사는 사람이 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과 이름을 위해 사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다윗의 관심이 오직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이었던 것처럼, 성도된 우리 역시 오직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 그것이 성도의 존재목적이다. 다윗은 사울을 위해 눈물 흘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이름을 위해서 눈물을 흘렸던 것이다. 이것이 우리와 다른 점 아닌가? 오늘날 우리의 눈물은 누구를 위한 눈물인가? 온통 나의 이익과 나의 영광을 위한 것 아닌가? 나를 알아주지 않아서 울고, 나의 자존심이 상해서 울고, 물질적 손해가 났기에 울고 있지 않는가? 성도는 주님의 이름과 영광을 위해서 울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내 안에서 발견되는 아말렉 사람의 모습 때문에 울어야 한다. 여러분, 믿음은 내가 아닌,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다. 믿음은 내 입장보다는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에 관심을 두는 것이다. 자기 유익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울고, 내 속에 발견되는 아말렉 사람의 모습 때문에 우는 성도가 되시길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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