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약4:11-17
제목:성도의 합당한 자세
첫째, 성도는 사랑할 의무는 있지만, 정죄할 권리는 없다.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고 하시는 이유는 “형제를 비방하는 것은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11절) 참 이상한 말이죠? 형제를 비방하고 판단하는 것이 왜 율법을 비방하고 판단하는 것이 될까요? 그것은 사람이 사람을 비방할 때는 자기의 죄와 실수와 허물에 대해서는 생각을 안하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타인을 비판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인간은 비판을 받아야 할 입장에 있을 뿐, 남을 비판할 자격과 처지가 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남을 비판한다면, 그것은 곧 자신이 비판받아야 할 사람이라는 것을 생각 안하는 것이다. 형제를 비방하지 말라는 말씀은 비방 자체가 나쁜 행동이기 때문에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너 자신이 형제를 비방할 자격이 없음을 아느냐?”는 뜻이며, “너도 비방을 받아야 할 악한 자라는 것을 아느냐?”는 뜻이다. <율법>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모든 인간은 심판을 받아야 할 죄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형제를 비방한다는 것은 자기자신을 형제보다 더 나은자로 여기고, 자기의 악을 보지 않는 것이 되기 때문에, 모든 인간을 죄인으로 선언하는 율법을 비방하고 거역하는 것과 같다. 여러분, 성도는 자기 자신이 신앙의 기준이 되면 안된다. 성도는 항상 예수 그리스도를 기준으로 해서 자신을 바라보아야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기준으로 해서 타인을 바라보아야 한다. 내가 기준이 되면 안된다.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12절)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하나님 한분뿐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누구도 입법자와 재판자의 자리에 있을 수 없다.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것을 기준으로 내세워도 안되고, 내 기준으로 다른 사람을 비방하고 판단해도 안된다. 성도가 십자가를 기준으로 형제를 대한다면 비방과 판단이 나올 수 없다. 왜냐하면 십자가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비방과 판단이 아니라, 용서와 은혜이기 때문이다. 십자가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우리의 모든 죄를 덮어주시는 사랑과 은혜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기 기준을 따라 신앙생활하면 안되고, 십자가의 법을 기준으로 신앙생활해야 한다. 만약 우리가 내 기준으로 형제를 대하지 않고, 십자가의 법을 기준으로 형제를 대하면 비방과 판단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기억하라. 성도에게는 사랑할 의무는 있지만, 정죄할 권리는 없다. 용서할 의무와 책임은 있지만, 남을 비방할 권한은 우리에게 주어진 적이 없다. 간절히 권면하는데, 가급적 남을 비방하는 자리에 서지 않도록 조심하시기 바란다. 여러분이 세상을 향해 비판할 자격있는 재판장이 아님을 기억하라.
둘째, 언제나 하나님의 뜻에 인생의 계획을 맞추어야 한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13-14절)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꿈과 비전, 인생의 계획과 목표를 책망하는 말씀이다. 그런데 그러면 믿는 사람은 사업을 해도 이익을 남기지 말아야 하고, 또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계획도 세우지 말아야 한단 말인가? 그러나 본문은 그런 뜻이 아니다. 장사를 해서 이익을 남기고자 하는 것을 책망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주관자가 누구인가를 잊고 사는 사고방식을 책망하는 것이다. 여러분, 인생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시다. 이 말의 의미가 무엇인가? 살고 죽는 것이 나의 소관이 될 수 없다는 뜻이다. 살고 죽는 문제만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하든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다는 뜻이기도 한다. 그래서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15절) 인생은 나의 꿈과 비전, 계획과 목표대로 살아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살게 하시는 대로 살아간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말씀이다. 만약 그것을 잊게 되면 나오는 것이 바로 <허탄한 자랑>이다. 그리고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라는 17절 말씀은 <착한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하지 않으면 죄>라는 뜻이 아니다. 즉 불쌍한 사람을 보면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또 그런 생각을 했으면서도 행하지 않으며 죄라는 의미가 아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신 곳에서 원망불평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선한 것>이다. 어떤 형편에서도 주변환경이나 주변사람을 원망하지 않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믿으면서 감사하는 삶을 사는 것. 이것이 선한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의 요구가 무엇인가? “성도는 언제나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뜻과 계획을 맞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그리스도인의 행동뿐만이 아니라 모든 삶을 지배하도록 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성도는 절대 자기의 뜻을 위해 사는 삶이 아니다. 철저히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한다. 그것이 무엇보다 우선해야할 기독교 신앙의 제1의 원칙이며 원리이다. 여러분, 언제나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뜻과 계획을 맞추는 성도가 되시길 축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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