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야고보서 1:1-11
제목: 시험이 주는 유익
히브리서가 끝나고 야고보서가 시작됩니다. 야고보서는 늘 오해가 있는 서신입니다. 믿음을 강조하는 바울과 행위를 강조하는 야고보가 마치 정 반대의 의견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오해라고 말씀드린 겁니다. 로마서부터 시작해서 빌레몬서까지가 바울서신이고 저자를 알수 없는 히브리서부터 시작해서 요한계시록까지 야고보 베드로 유다 요한이 쓴 서신을 모은 책입니다. 이렇게 순서상 앞과 뒤로 나누다 보니 바울은 믿음으로 구원받고 야고보는 행위로 구원 받는가? 라는 의문이 들기도 하지만 그러나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바울도 믿음으로 야고보도 오직 믿음으로 구원 받는 것을 설명합니다. 오직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받습니다. 이걸 전제로 야고보서를 살펴보겠습니다. 1절이 이렇게 시작되는데요.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라고 설명합니다. 이 부분이 중요합니다. 성경에는 4명의 야고보가 등장을 하는데요. 제자 중에 야고보가 2명이 있었고 또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가 있었죠? 또 유명하지는 않지만 유다의 아버지 야고보가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이 야고보서의 저자를 마태복음 13장 54절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라고 봅니다. 그럼 이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가 예수님을 믿었을까요? 안 믿었을까요? 안 믿었습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동생인 야보고가 볼 때 예수님은 미친사람이었죠? 형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니 그걸 어떻게 믿었겠습니까? 요한복음 7장에 보면 예수님의 동생들조차 믿지 않았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중에 야고보와 유다가 나중에 야고보서와 유다서를 씁니다. 왜 이런 반전이 있었을까요? 고린도전서 15장을 부활장이라고 했었죠? 거기에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만났던 사람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데요. 그중에서 7절에 야고보에게 보이시고 사도들에게 보이셨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러니 그 때 야고보는 예수님을 육신의 형이 아닌 구세주로 고백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1절에서 자신을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야고보서의 힌트가 있습니다. 왜 야고보가 이토록 믿음을 주제로 하고 있는 성경에서 믿음의 결과인 행위를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야고보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직분에서 자신의 권위를 찾고 있습니다. 실상 야고보 사도는 자신의 권위를 육체적인 조건에서 찾을 수 있는 사도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형제였고, 이미 그는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로 인정받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야고보는 자신의 외적인 권위를 자랑하자면 충분히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것으로 만족하고 그것을 자랑합니다. 또 한가지 야고보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의 내용과 잠언 1장에서 9장까지의 내용을 근거로 이 편지를 씁니다.
그렇다면 이 편지는 누구에게 쓴 책일까요? 야고보서는 “흩어져 사는 열두 지파에게” 수신인을 밝히고 문안하는 내용으로 시작합니다. 이 서신의 수신자들은 ‘흩어져 살던 열두 지파’입니다. 예루살렘에 박해가 있었을 때, 박해를 피해 밖으로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을 의미합니다. 야고보는 그들을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영적 후손으로 본향을 소망하며 이 땅 광야생활을 나그네로 살고 있는 사람들로 이해를 했습니다. 말 안해도 아시겠죠? 타향에서 나그네로 살아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들에게는 겪게 되는 시련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그리스도인들이 당하는 시험에 대해 그리스도인의 반응에 대해 권면합니다. 눈을 의심할 만한 단어죠? 그 시험을 기뻐하라고 가르칩니다. 여기. 시험이라고 번역되는 단어는 유혹보다는 시련이라는 표현이 합당해보입니다.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으로 인해 겪고 있던 시련과 가난으로 인한 모든 어려움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런 시험 시련 가난과 어려움을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있겠습니까? 게다가 참고 견뎌라 정도가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은 그 시련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고 오히려 ‘기뻐하라’고 가르칩니다. 어떻게 이럴수 있을까요? 시련 앞에서 기뻐한다는 것이 모순처럼 보이지만, 마치 금을 얻기 위해 다른 불순물들을 제거하기 위해 높은 열에 다른 불순물들을 태워 없애 버리는 것처럼 시련 앞에서도 기뻐하는 신앙은 믿음의 표현이며 시련을 기뻐하는 마음은 주님의 뜻을 신뢰한다는 증거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련에는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과 유익이 있는데요. 시련은 믿음의 연단이라는 유익이 있기 때문입니다. 시련은 믿음의 근육을 키워줍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끝까지 참고 견딜 수 있도록 해줍니다. 그리고 그 인내는 성도를 성숙으로 이끌게 됩니다. 그래서 이런 시련의 유익과 시련을 주시는 하나님의 목적을 생각하면 시련을 기쁘게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시련을 만날 때,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기뻐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도리어 시련 앞에서 자신이 한없이 힘없고 약하게 느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 때 그리스도인들에게 해결의 실마리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라고 권면합니다. 유명한 구절이죠 5절입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야고보가 말하는 지혜는 세상에서 통용되는 일반적인 지혜가 아니겠죠? 일반적인 지혜는 그리스도를 버리는 겁니다. 그럼 박해도 시련도 시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고보가 우리에게 권면하는 지혜는 ‘시련을 지혜롭게 이해하고 대처하며, 인내하여 성숙으로 나아가기 위한 지혜’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임기웅변이나 술수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지혜입니다.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시련 중에 지혜롭게 반응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지혜가 부족하여 하나님께 구하라고 권면합니다. 구하면 하나님께서는 지혜를 주시는 분이시라고 소개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아낌없이 주시고 꾸짖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소개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지혜를 구하는 자들에게 후히 주셔서, 그 시련을 통해 유익을 얻고 인내하며 성숙할 수 있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문제는 그 지혜를 구하는 자세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은 의심하지 말고 구하는 것입니다. 6절 ‘믿음으로 구하라는’ 것입니다. 여기,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구한다는 것은 시련에도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이 있다는 것을 믿는 믿음 위에서 구한다는 뜻입니다. 시련 중에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8절 두 마음을 품지 말고 상황에 따라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변하지 않아야 합니다. 어느 상황에서도 주를 신뢰하며 믿음으로 구하면, 하나님께서는 시련의 이유와 유익을 깨닫게 하시고 그래서 시련을 통해 더욱 우리의 믿음을 성숙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이런 지혜를 가진 사람의 특징은 자랑이 바뀌게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부요함이나 높아짐을 자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도리어 ‘그리스도 때문에’ 낮아지고 비천하게 된 것을 자랑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시련을 당하여 가난하고 비천하게 된 믿음의 형제들에게 ‘자기가 높아지게 된 것을 자랑하라’고 권면합니다. 세상의 외적인 조건으로는 비천하게 되었지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높아지고 영광을 얻게 된 것을 자랑하라는 말씀입니다. 반면, ‘부자’ 형제들에게는 스스로 자랑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부자가 세상의 관점에서 스스로를 바라보다가 자기 자랑에 빠진다면, 그들은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에, 낮아지게 된 것을 자랑하라고 가르칩니다. 결국 야고보에게 재물은 아무런 자랑의 근거가 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재물은 ‘풀의 꽃과 같이 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뜨거운 바람에 꽃이 시들고 마는 것처럼, 재물도 영원히 자랑할 것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성도님들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영광과 명예의 시간들이 아닌 ‘시련’의 과정을 가는 것입니다. 세상의 관점에서만 보면 그리스도 때문에 버릴 것과 손해 볼 일이 많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시련 중에서 그 의미를 찾고,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을 볼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래야 성숙한 신앙인으로 자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여 후히 주시는 지혜를 덧입는 우리들 되시길 소원합니다. 이 믿음의 길 이겨나가시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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