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고전 14:13-25
제목: 성도의 지혜
본문에 언급하는 지혜는 헬라어로 “프레이신”이라고 하는데, “생각하는 사고력, 반성하는 이성, 어떤 사물을 분별하는 분별력”을 말한다. 즉, 그리스도인은 <생각하고 분별하는데 있어서> 어린아이처럼 하지 말고 장성한 사람처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첫째, 지혜로운 성도는 지성의 작동을 멈추지 않는다.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13절) 왜 바울은 방언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하라고 했는가? “만일 내가 이상한 언어로 기도한다면, 기도하는 것은 내 심령뿐이고 내 이성은 작용을 하지 않습니다.”(14절/공동번역성경) 방언으로 기도하고 찬송하는 사람은 영으로 기도하고 찬송하지만, 스스로의 마음으로는 이해하지 못하고 하는 것이다. 내 이성이 작용하지 않는다는 말은 자신도 무엇을 기도하고 있는지 모른다는 뜻이다. 이것은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바울은 "지성 없는 신비주의"를 배격한다. 왜냐하면 성령의 역사는 성도를 무아지경으로 이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지성'(知性), '감정'(感情), '의지'(意志)를 온전히 회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아지경에 빠지는 것은 마귀에게 마음을 내어줄 여지가 있다. 그러므로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러면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15절) 무슨 소리냐 하면, <방언하는 동안 멍 때리고 있지 말고, 이성을 동원해서 기도하고 찬송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도는 지성을 배제한 신앙생활을 하면 안 된다. 우리가 신앙생활에서 주로 사용하는 “영적”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로기코스”인데, 로고스에서 파생된 말이다. 로기코스는 “논리적, 이성적, 지성적”이라는 뜻이다. 즉 영적이라는 말은 <논리적이고, 이성적이고, 지성적>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영적인 예배>는 우리의 지성과 이성을 제쳐놓은 예배가 아니라, 나의 이성과 모든 지성이 동원되어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예배이다. 믿음이 있을수록 더욱 분별력 있는 지성을 구비하려고 힘써야 한다. 그것이 지혜에 장성한 사람이다.
둘째, 지혜로운 성도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때와 장소를 구분한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도 방언보다 예언이 더 나은 이유를 설명하고 있는데, 예배 때에 방언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교회에 왔다가 교인들이 방언하는 것을 들으면 뭐라고 해요? “미쳤다”고 한다는 것이다. 21절에 바울은 사28:11 말씀을 인용하였다. 하나님께서 선지자 이사야를 보내서 이스라엘의 죄를 지적하고 책망하셨지만, 이스라엘은 듣지 않았다. 마치 이방인이 방언으로 말하는 것처럼 도무지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앗수르라는 이방인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점령하게 하여 이스라엘 전체를 알아들을 수 없는 앗수르 방언으로 가득하게 하시겠다는 것이다. 앗수르 사람이 무슨 말을 하든 이스라엘은 알아들을 수 없다. 이처럼 듣고도 알지 못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하는 이스라엘의 실상이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앗수르 방언을 듣게 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믿지 않는 자를 향한 심판을 의미한다. 바울은 구약의 사건을 배경으로 방언은 믿음에 아무 유익이 없음을 가르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방언은 통역이 없을 때는 공예배 때 하지 말아야 한다. 때와 장소를 구분하지 못하고, 아무 때나, 아무 장소에서나 방언을 한다면 그것은 믿음 없는 사람들을 배려하지 않는, 생각이 없는, 아주 지혜롭지 못한 행동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가르친다면 믿지 않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죄를 깨닫고, 또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깨닫고, 회개하며 하나님께 엎드려 경배하게 된다. 지혜로운 성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때와 장소를 구분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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