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고전 9:11-18
제목: 성도의 권리포기
첫째, 성도는 복음에 장애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권리를 포기해야 한다.
12절에 바울은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13-14절에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이 성전에서 나오는 것을 먹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세운 사람으로서, 마땅히 고린도교회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는 것이 당연했다. 그럴 권리가 그에게 있었다. 그러나 그는 고린도교회에게 마땅히 받아야 할 것, 즉 사례비를 받지 않고 일했다. 왜냐하면 자기가 고린도교회로부터 섬김을 받게 되면 그가 전하는 복음이 헛되게 될까 두려워서였다. 그러나 바울이 사도의 권리를 사용하지 않은 것은, 사도가 아니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의 자랑을 헛되게 하지 않기 위함이라고 15절에 설명한다. 바울의 자랑이 무엇인가? 바울은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만을 자랑했다. 그런데 사도로서의 권리를 요구하면 복음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자랑하는 엉뚱한 결과를 낳을 있기 때문에, 즉 사도의 권리를 요구하는 것이 자신의 공로와 업적을 자랑하는 것으로 오해받을까봐 염려한 것이다. 바울이 자랑했던 복음의 특징이 무엇인가? 한 마디로 정의하면, “은혜”이다. 구원은 우리의 노력과 행위와 공로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은혜의 반대말이 무엇인가? “공로와 자격”이다. 바울은 복음이 복음 되게 하기 위해서 사도로서의 자기 공로와 자격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했던 것이다. 사도가 자기 공로와 수고를 드러내면 복음의 목적인 은혜가 가려지기 때문이다. 성도는 누구인가? 성도의 존재목적이 무엇인가? 자기의 공로를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영광)를 드러내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가 자기 공로와 수고를 자랑하면 하나님의 은혜는 드러나지 못하게 된다. 바울이 사도의 권리를 주장하고 요구하면, 고린도교회는 바울의 수고와 공로를 인정하여 경제적 지원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드러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바울의 공로와 수고뿐이다. 그것은 복음을 복음되지 못하게, 즉 은혜를 은혜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가리는 일을 하지 맙시다. 우리가 자기의 수고와 공로를 주장하는 순간, 알아주기를 바라는 순간 하나님의 은혜는 가려진다. 우리 모두 말이나 행동이나 모든 일에 우리의 수고와 공로를 드러내지 않음으로, 오직 하나님의 은혜가 밝히 드러내는 성도 되시기 바란다.
둘째, 성도는 영원한 하늘나라 상급을 얻기 위해서 권리를 포기해야 한다.
바울은 사도의 권리까지 포기하며 경제적 후원을 받지 않고 자비량 선교를 했다. 그러나 바울은 16절에서 자신이 그렇게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다고 했다. 그 이유에 대해서 복음전도의 사역은 자신이 부득불 할 일이라고 말했다. 다시 말해서 복음전도가 반드시 해내지 않으면 안되는 자신의 사명이며 의무라는 뜻이다. 그래서 만일 자신이 복음전도를 하지 않으면 자신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사실 바울은 자기가 원해서, 자발적으로 복음전도자가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로 부르심을 받았다. “나는 사명을 받았노라”(17절)에서 “사명”은 헬라어로 “오이코노미아”인데, “청지기”라는 뜻이다. 그런데 바울이 살았던 시대의 청지기는 대부분 노예였다. 즉 자신이 복음을 전하는 것은 자신의 뜻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종으로서의 의무라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만약 종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이 일을 한다면 그에 상응한 보상을 받는 것이 당연하지만, 노예는 보상을 요구할 권리가 없으므로 자신은 교회에 보상을 요구하거나 경제적 후원을 요구하지 않고 무보수로 일하였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복음을 위해 충성한 바울에게는 실제 일절 보상이 없다는 것인가? 거기에 대해 바울은 18절에 “자신이 복음을 전할 때 값없이 복음을 전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않는 것”이 자신의 상이라는 것이다. 복음을 공짜로 선포한 것 자체가 상급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공짜로 복음을 선포해서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으면 그 자체가 상급이라는 것이다. 왜 공짜로 복음을 전해서 많은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상급이라는 것인가? 고전3장에 보면, 주님이 다시 오시는 최후의 심판 때에 불로서 각자의 공로를 시험할 때 그 공로가 인정되면 상을 받는다고 말씀하고 있다. 즉 바울이 바라는 상은 사람들에게 대접받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받을 상이었다. 바울은 영원한 상급을 위하여 자신이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를 포기했던 것이다. 여러분, 우리가 아무리 억울한 일을 당해도 선하게 살고, 아무리 힘들어도 충성하며 살아야 할 이유가 무엇 때문인가? 하나님의 상급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상이 없다면 대충 신앙생활해도 된다. 그러나 상이 있기에 성도는 오늘만 보고 살면 안 된다. 바울처럼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와 이익을 포기하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상급을 위해 살아가는 성도가 되라.
댓글 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