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고전8:1-13
제목:하나님의 사람답게 사는 길
성도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살펴서 판단하고 행동해야 한다. 하나님이 어떻게 보시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내가 어떻게 보느냐는 절대로 중요하지 않다. 다시 말해서, 신앙생활에서 내 기준을 앞세우지 말라는 말이다. 이것을 무시할 때, 성도는 자기 기준을 가지고 서로의 신앙에 대해서 비판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고린도교회의 문제이자, 오늘 우리의 문제이다.
첫째, 성도는 모든 일에 지식보다 사랑의 원리로 접근해야 한다.
고린도교회가 우상제물에 대해서 취한 행동은 두 가지였다. ➀우상제물을 먹는 것은 우상을 신으로 섬기는 행동이므로 먹으면 안된다라는 입장의 성도들이 있었고, ➁세상에 신은 오직 하나님 한분 밖에 없고, 우상은 신도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니므로, 우상에게 바쳤다고 해서 음식이 무슨 문제가 있느냐 먹어도 괜찮다는 입장의 성도들이 있었다. 문제는 이 두 입장의 성도들이 <서로 비판을 하는 것>이다. 문제는 양쪽 다 자기 생각과 자기 기준에서 말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바울은 자기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을 가지고 말한다. 바울은 우상제물에 대해서 “먹는 것이 옳다. 또는 먹지 않는 것이 옳다”고 답을 내리지 않는다. 바울은 우상 제물을 먹느냐 안먹느냐를 가지고 죄로 따지지 않는다. 우상제물을 먹는다고 죄가 아니며, 먹지 않는다고 해서 신앙이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직 죄가 되는 것은 <형제를 염두에 두지 않고 있는 것>이다.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1절) 여기서 알 수 있는 진리가 무엇인가? “신앙이란, 지식이 아니라 사랑이다”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사랑이다. 그런데 우리는 사랑으로 덕을 세우는 일에 힘쓰는 것이 아니라, 자기 지식과 기준을 가지고 “저 사람은 옳다 그르다, 저 사람의 행동은 좋다 나쁘다”를 가지고 싸운다. 성도는 성경지식이 있어야 한다. 성경 지식 없이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분별하지 못한다. 그러나 지식에 사랑을 더하지 않으면 교만이 된다. 지식은 사랑과 함께 가야 한다. 무엇이 하나님의 사람답게 사는 길인가? 사랑으로 사는 것이다. 사랑이 하나님의 마음이다. 형제의 유익을 위해서 자기 자유를 절제하고 포기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은 사랑이다. 여러분의 지식에 사랑을 더함으로 공동체에 덕을 세우기 바란다.
둘째, 개인의 자유로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것은 삼가 해야 한다.
“음식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내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않는다고 해서 더 못사는 것도 아니고 먹는다고 해서 더 잘사는 것도 아니니라”(8절) 이 말은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은 구원과 전혀 상관이 없다는 뜻이다. 먹어도, 또는 먹지 않아도 구원에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것이 구원받은 성도가 누리게 된 자유이다. 그러나 본문에서 바울이 강조하는 것이 무엇인가? <형제를 위하여 자기의 자유를 포기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13절) 바울은 자신도 우상의 제물을 먹을 수 있는 자유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자신이 우상의 제물을 먹음으로서 믿음이 약한 형제에게 유익이 되지 않는다면 자기의 자유를 포기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너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9절)고 권면한다. 왜인가? 믿음이 연약한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11절)이기 때문이다. 또 “형제의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라고 한다.(12절) 여러분, 교회가 무엇이고, 신앙생활이 무엇인가? 신앙생활은 나를 위하는 생활이 아니라 주를 위한 생활이다. 그리고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머리되시는 주님을 위한 곳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무한자유하지만, 그 자유에는 한계가 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하지 않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다. 나의 자유로 누군가를 실족하게 하면 안 된다. 여러분의 자유는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영원한 상급>이 될 수도 있고, 반대로 <책망과 징계의 사유>도 될 수 있다. 상급을 위해 자유를 절제하는 사람이 성숙한 성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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