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민35:22-34
제목: 성도의 인생원칙
첫째, 죄를 철저하게 미워해야 한다.
본문에서 주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 도피성으로 피한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도피성에도 원칙이 있다는 것이다. 살인자가 도피성으로 도피한다고 해서 문제가 끝나지 않는다. 도피성으로 가면 그 때 공개재판이 열린다. 재판에서 고의적 살인이냐, 아니면 우발적 살인이냐를 가린다. 그래서 고의적 살인이면 복수자(고엘)에게 내어주어 죽이게 한다. 그러나 우발적 살인으로 판명되면 도피성 안에서 보호해준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무조건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다. 고의로 지은 죄와 실수로 지은 죄를 분명하게 구분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고의로 지은 죄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벌을 받게 하시고, 실수로 지은 죄에 대해서는 긍휼을 베푸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이다. 고의로 지은 죄와 실수로 지은 죄를 똑같이 대우한다면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 아니겠죠? 하나님은 고의성이 없는 경우에 실수나 연약함으로 인하여 범한 죄에 대해 관대히 대하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의 연약함과 한계를 아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의로 살인한 자에 대해서는 아주 단호한 원칙을 세우셨다. 의도적으로, 계획적으로, 고의로 사람을 죽이면 반드시 죽이라고 하신다.(16, 17, 18, 20, 21절) 왜인가? 3가지 이유 때문이다. ➀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➁죄는 땅을 더럽히기 때문이다.(33절) ➂피흘림이 없이는 죄사함도 없기 때문이다.(33절) 피는 오직 피로 갚는 것이 하나님의 원칙이요, 하나님의 공의인 것이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놓치지 말아야할 것은, 우발적 살인도 죄라는 것이다. 실수로 사람을 죽게 하는 것, 즉 과실치사도 무죄는 아니다. 그러하기에 26-27절에 보면, 우발적 살인을 저지른 사람이 도피성 밖으로 나가면 복수자가 그를 죽일 수 있게 하셨다. 그러므로 성도가 절대 착각하지 말고,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는 분이라는 점이다. 얼마나 죄를 미워하시는지, 죄 문제를 해결하시고자 자기 아들 예수님까지도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실 정도로 죄를 미워하신다. 그러므로 성도가 절대 지켜야 할 원칙은 죄를 철저히 미워하는 것이다.
둘째, 항상 주님 안에 거해야 한다.
도피성 제도의 특이점은 도피성에 들어가 목숨을 건진 사람은 사건이 일어난 당시의 대제사장이 죽기전까지는 도피성을 나갈수 없다는 점이다. 25절, 28절, 32절에 “대제사장이 죽기까지, 대제사장이 죽은 후에, 죽기 전에는”이라는 말씀이 반복된다. 만일 대제사장이 1년만에 죽으면 일년만에 도피성에서 해방되고, 만일 대제사장이 30년후에 죽으면 30년동안 도피성에서 살아야 한다. 그런데 대제사장의 죽음이 살인자의 자유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실수로 죽인 죄, 즉 과실치사도 죄이기 때문에, 그의 죄를 대신하여 대제사장의 피가 흘러야, 또는 대제사장이 죽어야 속죄가 된다는 뜻이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말씀]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와 사망에서 자유하게 하고 해방할 것임을 선포하시는 말씀이다. 우리는 예수의 피로 죄에서 자유를 얻었다. 그런데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은 구약의 도피성보다 훨씬 더 좋은 도피성>이라는 사실이다. 어떤 면에서 그런가? ➀예수님은 구약의 도피성보다 훨씬 더 가까이 계시기 때문이다. 구약시대는 도피성까지 가는 길이 쉽지 않았다. 피의 복수자가 쉽게 쫓아온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멀리 갈 필요가 없다. 마음으로 “나는 죄인이고 예수님이 나의 구주시며 도피성”이시라는 것을 믿으면 예수님은 그 사람의 마음속에 이미 거하신다. ➁예수님은 실수로 지은 죄 뿐 아니라, 고의로 지은 죄까지도 용서하시는 도피성이 되시기 때문이다. 구약의 도피성은 실수로 죄지은 사람만 받아줬다. 그러나 예수님은 고의든, 실수든, 큰 죄든, 작은 죄든 모든 죄인을 다 받아주시고 용서하시는 구주가 되신다. ➂예수님은 일시적인 피난처가 아니라, 영원한 피난처가 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의 참된 피난처가 되신다. 오직 그분 안에서만 우리는 참된 자유와 은혜를 누릴 수 있다. 참된 피난처 되신 예수님은 우리가 새벽에 부르짖는 기도에 응답하시며, 우리의 연약함과 악함을 용납하시며, 영원히 인도하시는 좋은 분이다. 도피성보다 훨씬 더 좋은 예수님 안에 날마다 거하는 성도가 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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